내가 원하는 전부
<2017년 10월 6일>
추석날 언니네서 만난 엄마 아부지.
부모님은 아들들과 추석 아침을 보내고 큰딸 네로 오셨다. 아부지는 아침부터 움직여서 피곤하신지 누우셨고 삼모녀의 수다가 이어진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의 밀린 이야기를 들어주는 시간이다. 엄마가 경우(예의) 없는 여편네들을 응징(?)한 스토리를 여전히 생전 처음 하는 이야기처럼 반복하신다. 우리는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인양 다 듣고는 내가 한마디 했다.
"근데 나 이 얘기, 세 번째야."
그러자 언니도 한마디 했다.
"그러니? 난 다섯 번째인데."
그 순간 우리는 셋 다 폭소를 터뜨렸다. 엄마는 깔깔 웃으면서도 "아이고 세상에, 이 얘기 내가 했었니?!" 하신다. 하고 말고요, 몇 달 전부터 전화할 때마다 하셨지요. 내년이면 팔순인데 까먹는 게 당연하지요,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엄마의 반복 수다는 타고난 성격이다. 다행인 건 언니나 나나 역시 수다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게 별 문제가 안 된다는 것.
했던 이야기 하고 또 하는 것은 엄마만 그런 게 아니다. 언니도 그런다. 가끔은 나도 그런다. 물론 엄마가 가장 중증이지만.
특히 엄마와 언니는 정말 잘 맞는 모녀 사이다. 말 많은 거, 주변에 사람 많은 거, 활동적인 거, 뜨거운 목욕 좋아하는 거, 생활력 강한 거... 기질도 성격도 비슷하다. 피부 까무잡잡한 것도 생김새도 많이 닮았다. 언니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엄마를 빼다 박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언니랑은 다섯 살 차이가 나다 보니 어릴 때부터 그런 엄마와 언니를 질투한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나도 참 못 말리게 순하고 착한 아이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순위에 밀린 나는 그저 착하게 굼으로서 칭찬을 받는 쪽을 택했다. 엄마의 사랑을 두고 감히 언니와 경쟁하려는 꿈도 꾸지 않았다.
엄마의 맏딸 사랑은 유별났다. 초등학교 때부터 웅변을 했던 언니를 데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전국의 웅변대회를 쫓아다녔다. 집안에는 언니가 타 온 트로피가 방 한가득이었을 정도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댕강 바가지 머리였지만 언니는 중학교 입학 전까지 긴 머리를 유지했다. 그 시절에는 중학교에 가면 무조건 머리를 단발로 잘라야 했으니 최대한 긴 머리를 고수한 셈이다. 물론 엄마가 감겨주고 빗겨주고 묶어주고 다 관리를 해줬지.
그렇다고 엄마가 시간 많은 부잣집 맏며느리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가진 것 없는 아부지께 시집와 자식이 올망졸망 다섯이었다. 큰오빠가 애기였을 때부터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으니 늘 바쁘고 허덕이는 생활이었다. 그 모든 조건에도 불구하고 맏아들과 맏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절대 놓지 않으셨다. 큰오빠야 첫째에다 장남이니 그렇다 쳐도 장녀인 언니에 대한 사랑 또한 결코 장남 못지않았다.
나는 부모가 자식들을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믿지 않았다. 다섯 손가락 운운하는데 새빨간 거짓말이다. 부모도 부족한 인간인지라 더 아픈 손가락이 있고 덜 아픈 손가락이 있는 법이다. 우리 부모님도 편애를 했고 내가 엄마가 되어 보니 주변 다른 엄마들도 편애를 한다. 자기 자식이지만 더 이쁜 아이가 있고 덜 이쁜 아이가 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산다. 그게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다들 하나같이 자기는 절대 편애를 하지 않는다고들 항변하지만 제삼자의 눈에는 당신이 편애하는 거 다 보인다구요. 아마도 이래서 내가 자식을 하나만 두었을지 모른다. 내 자식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 건 언니가 부모님께 너무나 잘 하는 딸이라는 점이다. 대학생 때도 과외 알바를 해서 등록금을 보탰고 결혼 전까지 받아온 월급을 고스란히 엄마에게 드렸다. 그게 가계에 엄청난 보탬이 되었다는 사실. 부모님께 반항하거나 말썽을 부린 적도 없었다. 지금까지 부모님에게 가장 신경 쓰고 돌봐드리는 자식 역시 언니다. 돈이든 사랑이든 받은 만큼 돌려 드리는 착하고 능력 있는 딸. 이런 점 때문에 나는 엄마의 언니 사랑을 질투할 수 없었다.
그런 언니가 하나뿐인 여동생인 나한테는 냉정하게도 무관심했지만 그것 역시 불만을 가질 수가 없었다. 나보다 부모님께 헌신적으로 잘 하는 언니를 내 어찌 나무랄 수 있겠나. 나한테 잘 하면서 부모님을 나몰라라 하는 것보다야 그 반대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이런 콘크리트 모녀 사이에 반기를 든 건 딱 한 번이었다. 유방암 수술을 받았을 때.
흉사는 혼자 오지 않는 것인지 형부가 돌아가시고 한 달 후였다. 언니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나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엄마는 온통 아직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언니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암환자가 된 둘째 딸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직 과부가 된 첫째 딸이 안쓰러웠던 것이다. 그때 평생의 억울함이 터져버렸다. 암수술을 받아도 데면데면한 엄마와 언니에게 처음으로 서운함과 억울함을 폭발시켰다. 그 일 이후로 엄마는 둘째 딸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아마 엄마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을 게다. 언니도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또한 언니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한번 고착된 관계는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는 걸 느낀다.
다 같이 점심을 먹고 한참 수다를 떨다가 언니 집 근처 안양천에 산책을 나갔다. 언니는 요새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면서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걷는 사람과 자전거가 같이 다닐 수는 없는 일. 언니는 위쪽까지 달리고 오겠다며 멀어졌다. 나는 관절이 나빠서 잘 못 걷는 엄마를 모시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다 얼마 전 제주도 다녀온 사진과 인도네시아 여행사진을 보여 드렸는데 엄마가 이상하다. 온통 신경이 다른 데 가 있고 건성으로 응응만 하신다. 왜 그러나 했더니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리느라 그런 것이었다. 아니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그저 근처에서 자전거를 타고 있을 뿐인데. 언니가 눈에 안 보이니 둘째 딸이고 사진이고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오는 우리 엄마.
아, 엄마에게 언니란 이런 존재구나. 만약 내가 아니라 언니가 나처럼 6개월씩 여행을 다녔다면 엄마는 절대 못 견디셨겠구나. 작년 유럽 여행 중 내가 전화했을 때 교회에서 행사 중이라며 심지어 귀찮아하던 목소리였는데. 언니였다면 그런 일은 절대 없었겠구나. 딱히 서운한 건 아니었다. 울 엄마가 내년이면 팔십이다. 팔십 노인네에게 논리적인 반응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일인 게지.
이전에 잠깐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언니만큼 아니 언니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언니보다 더 부모님께 잘 하는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와서 내리는 결론은 그래도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 엄마에게 언니는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맏딸. 그건 나의 노력 여부와 상관없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마 언니가 천하의 말썽쟁이 딸이었어도 엄마는 마찬가지였을 테지. 보통의 많은 부모들이 아무리 못난 망나니라도 장남을 절대 포기 못하는 것과 같은 심리다.
누군가의 관심을 얻으려는 일은 이제 그만두었다. 그게 부모든 다른 가족이든. 친구 관계에도 그리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 내가 새롭게 하는 생각은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하자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것, 받고 싶은 것들을 바로 나 자신에게 해주자고 결심한다.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그들의 마음을 내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수백억 자산가라 해도 남의 마음을 살 수 있는가. 사람은 스스로 변하지 않는 이상 남에 의해 달라지지는 않는다. 스스로 변하는 것 역시 아무나 가능한 건 아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인 것을. 하물며 남의 마음을 어쩌려는 시도야 말해 무엇하리. 참말로 부질없는 짓인 것을.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하고 나에게 가장 사랑을 줄 수 있는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깨닫는 것은 천지차이.
이전에는 몰랐는데 가끔 딸이 있었으면 싶을 때가 있다. 아무리 잘 맞는 아들이라도 아들은 역시 아들, 남자다. 아들이 크고 보니 새삼 딸이 아쉬워졌다. 친구 같은 딸. 언니와 엄마 같은 모녀라면 참 좋겠다. 아니 나와 엄마 같은 정도만 되어도 사실 나쁘지 않다. 나 정도면 그래도 꽤 괜찮은 딸이니까. 엄마가 언니만 바라봐서 그렇지. 그러나 다 소용없는 욕심이다.
나는 딸이 있다면 해주고 싶은 것을 나에게 해주기로 했다. 내 엄마에게 받고 싶은 관심을 나에게 직접 주기로 했다. 스스로 충만하고 스스로 만족한다면 남들과의 관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군가 오면 좋고 안 와도 괜찮고. 혼자면 혼자라서 자유로워 좋고 함께이면 함께라서 어울리니 좋고.
이리 결심을 하니 홀로 여행 홀로 일상이 외롭지 않다. 오히려 즐겁기만 하다. 콘크리트 엄마와 언니를 봐도 서운하지가 않다. 오히려 엄마가 돌아가시면 언니가 너무 힘들어하겠다는 안타까움이 든다. 그러나 어쩌리, 그것도 자신들의 선택이고 인생이니. 각자 자기의 짐을 지고 가는 것이겠지.
내 인생을 오롯이 내가 책임지는 것.
남에게 내 인생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
남이 내 인생을 흔들지 않게 하는 것.
이것이 내가 원하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