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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Sep 27. 2018

히든(hidden) 싱어란 무엇인가.

추석 연휴 기념, 히든싱어 덕후의 주관적 썰

사실 이번 추석 목표는 여행기 업로드였다. 하지만 일단 이 글부터 쓰련다.


2주간 여행의 여파로 그저 쉬자는 생각뿐이었던 이번 연휴. 휴일 이틀째였던 23일,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히든싱어5를 시청했다. 왕중왕전 2부였다. 이후 며칠간 관련 영상+음원 재생을 무한반복했다. 수년째 애정하는 프로인데 새삼스레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덕질'에 불이 붙었다. 하루는 제부가 우리 집에 놀러왔는데, 나와 엄마, 동생의 히든싱어 토크가 폭발해 얼결에 히든싱어 시즌1부터 5까지 하이라이트를 약 2시간 동안 pooq tv를 통해 주요 엑기스만 보여주며 학습시켰다. DJ는 울 엄마.(울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아줌마계의 드라마 및 예능 분야 숨은 고수다.) 결혼 전까지 TV를 많이 안 봤다는 제부는 2시간 동안의 히든싱어 대향연에 미친 듯 폭소하면서도 거의 멘탈이 털린 듯했다. 난 다시금 깨달았다. 히든싱어는 정말 소중한 콘텐츠다.



숨겨져 있지만 슬프지 않은 주인공으로서의 '팬'


히든(hidden) 싱어라는 프로그램명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숨겨져 있는, 메인이 결코 아닌 싱어에 대한 프로다. 히든싱어에 출연하는 원조가수는 장르도 연령대도 다양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엄청난 실력자들이며 일정량 이상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원조가수 섭외 난으로 인해 다소 대중의 동의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는 하지만 난 여전히 히든싱어 원조가수의 절대적 기준치가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프로그램이 성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남은 원조가수 후보자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 사실은 히든싱어 애청자로서 아쉬운 부분이다.


<미녀는 괴로워>라는 영화가 있었다. 훌륭한 가창력과 목소리를 지녔지만 외모 때문에 무대 뒤에서 노래를 불러주는 '얼굴 없는 가수'를 자처한다. 히든싱어가 그려내는 이미지는 이와 비슷한 듯 다르다. 모창 능력자들은 원조가수와 최대한 같은 목소리를 내는 데서 정체성을 찾는다. 이들 중엔 아주 오랜 팬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수년 심지어는 수십 년간 CD를 수백 번, 수천번 들은 이들이 디테일 묘사에 강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의 한때 우상과 만나고 한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만으로 무한한 감격을 표한다. 요즘 '성덕'(성공한 덕후)이란 말이 자주 회자되는데, 이들이야말로 모창을 무기로 방송까지 출연하니 성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모창 능력자들이 모두 팬심을 가진 이들은 아니다. 노래를 매우 잘하는 사람인데, 그중에 어떤 가수와 목소리가 특히 비슷해서 출전하는 이들도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미묘한 차이는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미 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얼굴이 알려졌거나, 다른 가수와 호흡까지 맞췄던 이들이 자신이 모창 할 수 있는 가수의 히든싱어 편에 재출전하는 게 대표적인 경우다. 이들은 편의상 어느 정도 팬으로 포장되지만 굳이 억지스럽게 열혈팬으로 연출되진 않는다. 둘 다인 케이스도 있다. 어느 정도 팬인데 모창도 잘하는 경우. 보통 노래를 뛰어나게 잘하는 사람들은 다방면의 가수들 '덕질'을 하기 때문이리라. 재밌는 건 히든싱어로 소위 뜬 모창 능력자 중엔 진성 팬들이 많단 사실이다.


목소리를 가려내는 참을 수 없는 즐거움


히든싱어 시청자로서 재미의 핵심은 누가 원조가수인지 가려내는 행위 자체에 있다. 이게 왜 이렇게까지 재밌는지 고찰해봤는데, 깊게 들어가면 음악을 넘어 기술적인 음향의 영역에까지 뻗어나가 복잡해진다. 단순히 풀이해보자면 일단 사람의 목소리, 정확히는 노랫소리를 구별하는 것 자체가 재밌다. 사람의 음성은 각기 매우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하고, 그러면서도 도저히 같지 않은 미세한 차이가 있다. 히든싱어 영상의 스트리밍 횟수가 유독 높은 것은 이 차이를 두고두고 곱씹으며 재미를 느끼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히든싱어에 선정된 곡은 어느 정도 대중적 인지도와 작품성이 있어 누구나 '맞힐 수 있다'고 생각하게(때론 착각하게) 한다. 하지만 모창 능력자들의 수개월에 달하는 연습량과 (+많은 경우 수년간의 팬심), 원조가수들의 다년간의 발성 및 목소리 변화, 그날의 컨디션, 라이브 무대의 변수가 더해져 싱거울 것 같은 게임에 혼돈이 일어난다. 완창이 아닌 짧은 구절의 모창은 더욱 변별력이 적어진단 사실도 제작진이 잘 이용했다. 노래도 재미의 포인트다. 당대를 풍미했던 추억의 명곡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다. 히든싱어에 나온 후 차트 역주행은 흔한 일이 됐다.



이 '악마의' 재미는 소위 '막귀' 논란을 불러오기도 한다. 골수팬들은 원조가수의 초기 CD 음성부터 최근 라이브까지를 꿰뚫고 있기에 높은 원조가수 적중률을 자랑하는데, 이 때문에 종종 현장 청중단의 투표 결과에 이의가 제기된다. 특히 원조가수가 탈락하는 경우 오랜 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격렬히 항의하기도 한다. 현장음이 TV와는 다르다는데, 다년간 시청한 바로는 이유 없는 투표 결과는 없었던 것 같다. 원조가수가 탈락했다고 꼭 실력이 떨어졌다고 볼 순 없지만 대중들이 기억하는 혹은 원하는 목소리가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는 있다. 이 모든 논란과 변수는 히든싱어의 재미를 끌어올리는 포인트다.


여기까지는 제작진이 이 프로를 기획할 때 어느 정도 예상했을 것들이라 생각한다. 내가 특히 관심을 갖는 건 기대 밖의 현상과 효과들이다. 


숨겨진 가수, '모창'을 통해 메인 가수가 되다


모창 능력자들은 '히든싱어'의 모창자로 머무르지 않고 이 프로그램의 바운더리를 뚫고 나가는 중이다. 먼저, 원조가수와 목소리가 너무 똑같아서 화제를 모으고, 유튜브와 네이버 TV캐스트 등에서 엄청난 스트리밍수를 기록한다. 댓글창에서 모창능력자들의 닉네임뿐 아니라 본명이 호명되기 시작하고 응원 댓글이 달린다. 팬덤이 형성된다. 모창능력이 신기할 정도로 훌륭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모창이 훌륭하려면 가창력과 기본기가 갖춰진 경우가 많기에, 대중들이 '히든'싱어가 아닌 독립적 싱어로서 발전하기를 기대하고 응원하는 경우가 더러 생긴다. 특히 왕중왕전까지 나가면 개인의 매력을 발산할 기회가 훨씬 많아져 인지도가 확 뛴다. 



실제 히든싱어 출연을 계기로 자기 음반을 낸 모창 능력자들이 꽤 많다. 임창정과 환희 모창능력자로 인기를 끈 조현민과 박민규가 각각 싱글 앨범을 냈고, 연세대 화학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휘성 모창능력자 김진호는 진로를 바꿔 가수 데뷔를 했다. 이미 '보이스 오브 코리아'에 출연했던 거미 모창자 이은아도 히든싱어에서 대히트를 친 후 앨범을 내고 본격 활동 중이다. 김경호 편에 원킬로 인기를 모은 곽동현은 본래 가수 활동 중이었는데 히든싱어를 계기로 인기가 급상승했고 작년엔 팬텀 싱어 준우승까지 해 날개를 달았다. 


본래 가수였던 사람도 있지만 '용접공 임창정' 조현민처럼 인생이 바뀐 경우도 있다. 히든싱어의 파급력은 대단한 듯하다. 꼭 음반을 내지 않더라도 모창만으로 원조가수와 콘서트에 같이 서거나 주변에서 공연 섭외 요청이 많다고 한다. 일단 인지도가 높아지면 자신의 곡으로 음반을 내기도 훨씬 쉬워진다. 이번 시즌 린 모창능력자 2명은 네이버 TV 왕중왕전 영상 댓글창에 아예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홍보했다. '숨겨진' 싱어라는 의미의 히든싱어 프로그램이 모창을 매개로 독립된 뮤지션으로 거듭나는 통로가 되고 있단 사실은 너무나 흥미롭지 않은가.

 


재능발굴 플랫폼으로 진화하는 히든싱어


과거에 비해 다양한 플랫폼이 생기면서 적은 비용으로 자신의 재능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유튜브에는 지금 이 시간에도 재야의 고수들의 영상이 계속 업로드되고 있다. 하지만 바다와 같은 콘텐츠 속에서 시선을 잡아두기란 여전히 쉽지 않고 수많은 재능들이 묻히고 만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때에 등장한 히든싱어는 '모창'이라는 전에 없던 콘셉트로 해당 가수의 팬덤을 TV 앞에 모이게 하고, 일부는 '성덕'으로 TV에 출연하게 하고, 그중 일부 뛰어난 재능은 가수로 만들기까지 했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시즌을 거듭하며 시들해진 반면 히든싱어는 시즌을 거듭해도 인기가 식지 않고 보기에 따라 재능 발굴 면에서도 의도치 않게 앞서 나가고 있다. 아마도 매 회 원조가수들의 독보적인 매력이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담보하고 이 팬덤이 실력 있는 모창능력자들에게로 고스란히 전이되기 때문이 아닐까. 히든싱어는 포맷 자체도 신박하지만, 모창 능력자들과 시청자들의 순수하고도 열정적인 팬심이 프로그램을 애초 기획의도 이상으로 재창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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