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 알못'이 파스타 만들기에 빠진 이유는
난 요리를 잘하지 못한다. 음, 정확히는 많이 해보지 않았다. 부모님과 같이 살다 보니 장성해서도 엄마 밥을 먹었고 (전업주부인 울 엄마는 요리를 아주 잘 하신다.) 대학생 이후부턴 집 밖에서 보내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딱히 요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근데 유독 파스타 만들기에는 취미를 붙였다. 한 2~3년 된 것 같은데, 제대로 불붙은 건 반년쯤 됐다. 가끔 다른 메뉴를 시도하긴 하지만 어쩌다 보니 거의 항상 파스타만 파고들었다. 파스타계(?)에선 어느 정도 경지에 올랐다고 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 '요리를 잘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자고로 '요리를 잘하는 여성'이라면 찌개와 국류부터 섭렵하고 7첩 반상을 뚝딱 차려내는 정도가 돼야 할 것만 같다. 난 거기엔 해당하지 않는다.
왜 파스타를 만드냐 물으신다면, 일단은 '개취'(개인적 취향)라고 답하겠다. 난 워낙 다 잘 먹지만 특히 파스타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식성이 특이해서 한국사람들이 보통은 느끼하다고 할 법한 음식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지만 언제부턴가 파스타가 내 마음속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어떤 음식을 특히 좋아할 때 이유가 필요할까.
여행도 영향을 끼쳤다. 직장인이 된 후 별다른 사치는 하지 않는 대신 여행에 투자했다. 또 여행하면 먹는 재미 아닌가. 세계 곳곳을 다니며 길거리 음식부터 고급 음식까지 섭렵했는데 파스타는 어디서나 크게 실패하지 않는 품목이어서 즐겨 먹었다. 그중 이태리 본토에서 먹은 파스타 맛은 나의 미각 세계에 충격을 가져왔다. 이런 경험들로 인해 난 파스타에 있어서는 본토의 맛을 지향하게 됐다. 주재료와 면 본연의 식감과 풍미를 살리는 심플한 조리법, 풍부한 올리브유와 치즈의 사용.. 보통 한국사람들 기준으론 '짜다'고 생각할 만큼 간이 세지만, 사실 한국화 된 파스타보다 소스가 훨씬 심플하다.
울 엄마는 요리 장인이지만 샘킴 식 '건강식'을 지향하셔서 파스타에 있어서만큼은 내 취향과 살짝 차이가 있다. 내 취향이 옳거나 우월한 게 아니란 건 잘 안다. 심지어 살찌기 쉽다는 것도. 그러나 어쩌랴, 입맛이 그런 걸. 암튼 우리나라에서 내 맘에 쏙 드는 파스타집은 많지 않았고, 일부 있어도 너무 비쌌다.
근데 단순히 '파스타 성애자'란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느 순간 뭔가 음식을 만드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부모님과 같이 산다고 해도 이 나이를 먹고 퇴근 후 매번 엄마에게 밥 해달라 하긴 죄송한 노릇이다. 집에 밥이 남아있으면 내가 차려먹지만, 아빠도 평일에 늦게 퇴근하실 때가 많으니 밥이 항상 있는 것도 아니다. 언제부턴가 저녁 약속이 없는 날엔 먹을 것을 사 오는 일이 많아졌다. 근데 1인분 사 올 메뉴는 매우 한정적이다. 요즘은 웬만한 음식 테이크아웃이 가능해졌지만 아무리 맛난 음식도 포장해오면 식어서 맛이 떨어지기 마련. 김밥이나 샌드위치를 제외하면 빨리 포장해올 수 있는 건 대부분 식은 음식이다. 후다닥 인스턴트 음식을 사 와서 후다닥 먹으면, 분명 당장의 배고픔은 채워졌는데 공허했다. 뒤돌아 서면 '내가 뭘 먹긴 했나' 싶은 맘이 드는 것이다.
예전에 SBS 스페셜 '옴니버스食 다큐 더 잘 먹는 법'을 보다가 이런 내 마음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을 만났다. 한때 바쁘단 이유로 컵라면만 먹다가 요리에서 소소한 기쁨을 발견하기 시작한 젊은 인디밴드 뮤지션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누리고 사는 사치가 먹는 것 외에 별로 없단 것을 알게 됐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먹고 사느라 바빠서 제대로 먹을 여유가 없단 말을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얼마 없는 시간, 그때 나는 이제 요리를 한다.
그렇다. 종일 회사에서 일하다 저녁에야 허락된 짧은 나만의 시간, 당장 배고프다고 인스턴트 음식을 후루룩 흡입하는 건 뭔가 슬프다. 이 뮤지션은 이런 말도 했다.
인생이 원래 불안하잖아요. 밥을 먹고 있어도 불안하고 오락을 하고 있어도 불안하고, 일을 하고 있어도 계속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생기잖아요. 그걸 다 내려놓는 거죠. 내가 직접 요리를 해서 내가 나한테 먹이고. 그럴 때 인생에 대한 불안함이 사라진다고 생각해요.
맞다. 요리를 할 땐 잡념이 없어진다. 아주 간단하고, 심지어 내가 곧 먹어서 없애버릴 것이지만 그걸 만드는 데 잠시나마 초집중하게 된다. 사실 내가 파스타 만들기에 본격 몰입하게 된 건 내가 개인적으로 매우 힘든 일을 겪었던 지난 반년 동안이었다. 매주 1~2차례 이상 파스타를 만들었다. 아주 다양한 종류로 실험도 해가면서. 토요일엔 거의 항상 발레를 가는데, 끝나면 학원 바로 앞 백화점에 괜히 들러 이런저런 재료 거리를 사와 요리를 해서 먹으면 하루가 순삭. 괜히 새로운 파스타 면이나 페이스트 따위를 비교하고 이런저런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지난 반년 간 일이 안 바빴냐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역대급 업무량을 찍었을 때인데, 음식을 해 먹는 원초적인 일에 몰입하면서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치유했던 것 같다. 이 천재 뮤지션님은 이런 명언도 남겼다.
대부분의 창작물은 조합이잖아요. 음악은 베이스랑 기타랑 드럼이랑 보컬 조합이잖아. 요리라는 조합은 제일 많이 보급돼 있어서 다른 창작물에 비해 쉽게 만들 수 있고, 바로 먹을 수 있고, 맛을 볼 수도 있고, 볼 수도 있고. 음악은 못 만지잖아요. 근데 음식은 효과를 바로 볼 수 있는 거니까.
하나의 예술인데 쉽게 만들 수 있는 예술.
그러하다. 음식은 그게 무엇이든 하나의 고유의 창작물이다. 이 어려운 세상, 가장 쉽게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창작물 아닐까. 그런 면에서 파스타는 내가 만들 수 있는 음식 중 제일 쉽고, 큰 만족감을 주는 것이었다. 긴 과정을 요하고 오랜 내공이 절대적으로 빛을 발하는 한식과 달리 파스타는 누구나 30분 내에 만족스러운 한 그릇을 완성할 수 있다. 꼭 오랜 요리 경력이 유리한 분야도 아니다. 진입장벽이 낮다. 파스타를 자주 하는 사람들은 이게 라면보다 간편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할 것이다.
최근 몇 달간 인스타에 파스타 사진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지인들로부터 '파스타 장인'이란 말까지 듣고 있지만 그것은 큰 오해다. 난 그냥 내 멋대로 내 입맛에 맞게 만들 뿐이다. 아직까지 내 요리는 철저히 나 스스로를 위한 사치에 가깝다. 엄마는 "이제 한식도 좀 만들어 보라"고 하신다. 엄마의 노파심이 이해는 간다. 내가 아무리 파스타 만들기 실력을 레벨업 해도 '요리 잘하는 여성'으로 불리진 못할 것이다. 사실 각종 샐러드나 다른 서양식 요리로는 스펙트럼을 넓혀가는 중인데, 아무래도 요리 잘한단 말을 들으려면 한식 마스터가 되는 게 지름길일 것 같다. 뭐 언젠가는 한식도 만들고 싶어 지겠지. 일단은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고 싶다.
덧. 이 글을 쓰면서 SBS 스페셜 해당 회차를 다시 봤는데, 내가 '뮤지션'이라고 칭한 분이 중식이밴드 정중식님이란 걸 알게 됐다........... 이자리를 빌어 주옥같은 말씀들, 감사말씀 올립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