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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Sep 19. 2020

남매의 여름밤, 나의 할아버지댁을 떠올리다

다시 오지 않을 여름날.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아프게 한 걸음씩 성장했다.

우리 할아버지댁은 세검정이었다.(그땐 지명인지도 모르고 불렀다) 눈이 오면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가파른 경사 길을 올라야 나오는 양옥집. 어려서 지리 감각이 있을 턱이 없기에, 엄마 손 붙잡고 버스를 한참 타야 도달했던 세검정은 내게 심리적으로 시골과 다름 없었다.



이곳에서 한 살 위 사촌언니와 놀았던 여름방학을 잊을 수 없다. 그림일기를 매일 써야 했으니 초등학교 1학년 때였나, 고작 1,2박이었지만 아파트를 떠나 정원 달린 집에서 생애 첫 외박(!)을 하며 논 일은 마치 몇 달의 일처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언니와 난 미지의 세계였던 지하 차고로 내려가는 비밀구멍을 발견했고, 2층 옥상까지 온집안을 쑤시고 다니며 별의별 놀의를 다 했다. 꽃놀이도 하고 봉숭아물도 들이며 어느 때보다 자연과 혼연일체된 시간이었다.


이것 말고도 ‘세검정’에 얽힌 기억이 많다. 동네어귀 보은슈퍼에서 사먹던 보석캔디, ‘여명의 눈동자’ 놀이, 심심하면 앨범 뒤적이며 할아버지 젊었을 적 차인표 닮은(!) 시절 사진 보기 등. 세검정에서 사촌들과 놀다 밤 늦게 집에 돌아갈 때면 난 바보같이 울곤 했다. 짧게. 일종의 의례였던 것 같다. 고작 하루 정들었다고 떠날 때마다 울어댄 나. 꼬맹이도 이별이 슬펐던 걸까.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기억 깊숙이 침잠해 있던 세검정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속 할아버지 집은 세검정과 꽤 닮아 있었다.


영화 초반엔 반신반의했다. 평이 좋아 기대가 컸는데 너무 잔잔하고 별 사건도 없고 뭐지 싶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옥주에 완전 이입돼 울고 웃는 날 발견했다. 귀엽기만 한 동주가 엄마한테 받은 책가방을 자랑하다 옥주한테 혼나 (영문도 모르고) 서럽게 우는 장면에서 왜 이리 눈물이 쏟아지던지. 할아버지가 말없이 등장해 조용히 남매를 달래는데 눈물 대폭발. 극중 할아버지는 거의 대사가 없는데 인자한 표정만으로 위안이 됐다. ‘내가 너의 모든 마음을 안다. 다 괜찮다’하는 것 같은.



초탈한 표정의 할아버지와 달리 옥주는 세상이 물음표 투성이다. 이해 안 되는 일들이 너무 많고 고민도, 비밀도 많다. 이 작은 집안에도 복잡다단한 일들이 왜 이리 많은지. 영화는 초탈의 경지에 이른 할아버지도, 인생살이에 닳고 닳은 아빠와 고모도, 철모르고 해맑기만 한 동주도 아닌 옥주의 시선을 따라간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아직 순수하지만 알 건 아는 나이. 당사자로선 가장 고민 많고 괴로울 때지만, 그 예민함도 참 이쁘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 나도 그땐 그랬지.



특히 할아버지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극명히 드러난다. 할아버지가 떠난 집에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는 남매. 철부지 동주도 죽음이 뭔지 짐작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옥주가 오열한 건 단순히 할아버지의 죽음이 슬퍼서만은 아니고 복합적인 성장통의 발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옥주네 다섯 식구가 함께한 찰나의 여름날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세검정이, 그 여름이 이제 없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그렇게 아프게 한 걸음씩 디디며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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