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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연 Dec 16. 2021

오늘도 '그랑제떼'!

일상의 틈새로 날아오르다, 박기자의 ‘나빌레라’

"무용 하셨어요? 자세가 좋으시네요."      

어렸을 때부터 난 종종 이런 말을 들었다.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한데도 유난히 곧은 자세와 사뿐사뿐한 걸음걸이 때문이었을 테다. 가녀리고 청순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성인이 된 후(기자가 된 후엔 더더욱) 내 체형과 걸음걸이가 다소 터프하게 바뀌었지만. 이런 얘길 들을 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내 머릿속 무용수들은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전형이었으니까. 하긴 내 주변에도 어려서 발레를 배운 친구들이 꽤 있었는데, 난 아니었다. 미술과 음악 등 예체능을 이것저것 배웠지만 발레는 내게 왠지 모르게 먼 것이었다. 부끄러움 많고 '몸치'였던 난 성인이 될 때까지 모든 종류의 춤과 거리가 멀었다.      


발레수업 첫날의 굴욕


2016년 가을 어느 날, 갑자기 발레를 왜 시작하게 됐는지 명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당시 힘든 이별을 겪고 무언가 새로운 도전이 절실했다는 것. 모두에겐 그런 시기가 있지 않나.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로 맘고생을 심하게 하고 나니 뭐든 저지르고 싶어졌다. 뭔가 새롭게 배우는 건 몸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내 마음대로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고작 30대 초반이었건만, 당시 난 바보같이 뭔가를 시작하기에 이미 늦었다는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근데 이별을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어차피 늦은 거 더 늦기 전에 다 해보자고.     

아마도 내 머릿속 한편엔 발레가 있었던 것 같다. 생생히 기억나는 순간이 있다. 대학 시절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 맨해튼의 링컨센터에서 생애 첫 발레 공연을 봤다. 학생 특가라 우연히 선택한 것이었는데, 그날 밤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느꼈다. 당시 감격에 겨워 남긴 리뷰는 현재 싸이월드가 막혀 열어볼 수 없다. 구글링을 아무리 해봐도 공연정보를 못 찾겠다. 다만 무대의 잔상은 어렴풋이 떠오른다. '백조의 호수' 같은 고전극이 아닌 현대극이었는데, 친숙한 영화 장면들과 사운드트랙이 재현됐다. 음악과 어우러진 춤사위는 낭만적이었다. 문과생으로 글과 말에 경도된 삶을 살아온 내게 몸으로 하는 무언의 예술은 뜨거운 인상을 남겼다.      


이 공연이 아니었다면 내가 '취발러(취미 발레인)'가 되지 않았을까. 결론적으로 한 마리 백조 같은 무용수와 나의 취발러 라이프는 꽤나 큰 간극이 있다. 특히 본캐가 '기자'인 바람에 부캐로서의 삶은 꽤나 역경과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환상은 수업 첫 날 깨졌다. 보통 발레 하면 토슈즈를 신고 발끝으로 선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실상 토슈즈는 엄청난 연습량을 소화한 뒤 시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수업 준비차 토슈즈에 비해 폼이 덜 나는 발레슈즈를 바느질하며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난 자신이 있었다. 타고나길 유연성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수업 날 선생님 말씀은 내 기대에서 크게 벗어났다. "소연씨는 연체동물 같네. 근육이 하나도 없어." 난 사정없이 흐물거렸다.



발레리나들이 사뿐히 서고 점프하는 것은 유연성 이전에 엄청난 근력 때문이었던 것이다. 천으로 된 발레슈즈 안에 내 다섯 발가락과 뒤꿈치를 온전히 지탱하고도 발레의 기본 동작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려울 줄 처음엔 미처 몰랐다.     


발레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뭐라 답할지 모르겠다. 평소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다. 난 이걸 왜 하고 있나. 쉽게 실력이 늘지도 않고, 웨이트에 비해 다이어트 효율이 극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난 5년여간 투쟁에 가까운 안간힘을 쓰며 취발러 생활을 이어왔다. 잦은 회식과 야근 속 일주일에 두 번 수업을 사수하기 위해 '쿠폰제'를 활용함은 물론, 한반도 정세가 출렁일 땐 일단 발레학원에 나왔다가 중도에 뛰쳐나가 김정은과 트럼프 기사를 쓰다 들어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지만 발레는 내게 '위안'인 것 같다. 일상과 일터의 어떤 혼란에서라도 잠시 빠져나와 내 중심을 새롭게 가다듬을 수 있는 반복된 의식(ritual)이자 수련이다. '꿈'이기도 하다. 당장 잘하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래 계속 하고 싶은 무언가. 삶의 잦은 기복과 파도 속에서도 삶을 이어나가게끔 하는 즐거움.     

발레수업의 미덕은 '반복'이다. 바에선 쁠리에(plie), 탄듀(tendue), 제떼(jete), 퐁듀(fondu) 등을 연습하고 센터에서 이를 연결해본다. 그날그날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비슷한 순서를 따른다. 전공자들의 연습 초반 루틴도 크게 다르지 않다. 파리와 런던에서 수강을 해보아도 동일했다. 이러한 반복이 지루하기는커녕 묘한 위안을 주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오늘 하루 내 출입처에서 어떤 혼을 빼놓는 일이 일어났어도 난 또 다시 쁠리에를 하고 있다는 안도감. 음악에 몸을 맡기고 천천히 쁠리에를 할 때면 모든 근심, 스트레스를 던지고 세상 가장 우아해지는 행복감에 빠져든다.     

 

이루기 어려워 더 아름다운 목표


발레는 '반복'의 예술이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늘 새롭고 절로 겸손해진다. '지젤'과 같은 유명 작품도 뜯어보면 기본 동작의 반복과 변주인데, 단 하나의 기본 동작도 제대로 하기는 간단치 않다. 정수리를 위로 끌어당기고 갈비뼈를 닫고 어깨는 내리고 허벅지와 종아리는 밖으로 턴아웃한 상태를 지속하는 건 기본이다. 기본기가 갖춰진 뒤에야 발레의 아름다움을 체화할 수 있다. 그건 궁극적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미학이다.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올 초 방영된 웹툰 원작의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70세 덕출은 왜 발레가 하고 싶냐는 채록의 질문에 "죽기 전에 나도 한 번은 날아오르고 싶어서"라고 한다.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는 같은 질문에 "그냥 기분이 좋아요. 하늘을 나는 새가 된 것처럼요"라고 한다. 무용수의 점프가 감동을 자아내는 건 인간이 노력과 의지로 자연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비전공자인 내가 하늘을 날기란 어렵다. 하지만 도달하기 어려워 아름다운 목표도 있는 법이다. 난 일상의 틈새에서 작은 꿈을 꾼다. 내 점프가 아주 조금씩 이상에 가까워짐을 느낀다. 무엇보다 난 나를 몸으로 표현하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다.     


발레수업은 대개 '그랑제떼'로 마무리된다. 공중에서 두 다리를 최대한 크게 벌리며 점프하는 것으로, 찰나지만 상공으로 박차 오르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누가 뭐래도 자유롭게, 난 오늘도 '그랑 제떼'!


(이 글은 한국여기자협회의 '여기자책' 2021년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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