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의 절망적 행복, 그럼에도 쓸 수밖에 없는 마음에 대하여
길고 긴 주중을 보내고 주말을 앞둔 불금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생각했다. 트레바리 이벤트로 정한석 평론가의 '영화 비평'이 떴을 때 자동반사적으로 신청했지만 요일은 미처 살피지 못했다. 퇴근 후 살짝 망설였지만, 강연이 시작된 순간부터 아무 생각 없이 몰입됐다. 영감을 받는다는 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누군가가 아주 적절한 언어로 나 대신 말해주는 것이구나, 오랜만에 절감했다.
두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 정 평론가는 바로 핵심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영화에서 무엇을 보는가. 혹은 무엇을 봐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면 '메시지'에 대해 말한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xx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롭기 때문에 옳고, 정의롭지 않기 때문에 나쁘다. 정 평론가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떤 영화엔 메시지가 없다. 메시지가 없다고 불안해 할 필요는 없으며, 메시지가 감상의 제1의 근거는 아니다."
메시지만큼 우리가 영화를 이야기할 때 많이 말하는 것은 '상징'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 인물, 혹은 사물은 뭘 상징하고, 숨겨진 메타포는 무엇이고.. 우린 종종 영화의 숨겨진 상징을 해독하고 독해하려는 강박에 시달리지만 정 평론가는 상징을 통해 드러나는 주제에 대해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삶의 중요한 것들은 대개 무의미하다. 메시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죽음, 사랑, 시간의 흐름에 메시지가 있나. 그냥 맞게 되는 것들이다. 미지의 것이고 뜻도 없고 풀이도 안 되지만 우리의 관심을 바라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체감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영화를 볼 때 중요하게 다뤄져야 하는 것은 느낌, 감각, 체험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수전 손택은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erotics"이라고 했다. 영화를 보고 해석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에 얽매이지 말고 자유로워지라는 의미다.
정 평론가는 '스포일러' 강박에도 일침을 가한다. 특히 관객들이 영화의 다양한 면면 중 유독 '플롯'에 대해서만 특권적으로 스포일러를 적용하는 것이 문화적 이데올로기라고 지적한다. 영화의 서사를 그 자체로 '체험'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해독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그다지도 중요하다면 때때로 우리가 한 영화의 줄거리를 알면서도 수십번 되풀이해서 보는 이유는 설명될 수 없다.
정 반대편의 문제도 있다. 영화의 서사 만능주의를 비판하면서 개념적 덩어리에 사로잡혀 있는 전위적 영화들이다. 자신이 지식인이라 생각할수록 이 덫에 빠지기 쉽다고 정 평론가는 말한다. "개념 가득한 이미지에 유혹될 필요는 없다." 한 독일 감독은 영화는 미학이 아니라 '운동력'이라고 했다고 한다. 영화란 추상적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릎과 허벅지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화에서 봐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 평론가는 '영화의 구체적 사태들'이라고 말한다. 수전 손택은 "좋은 영화에는 언제나 해석의 충동에서 우리를 완전히 해방시키는 직접성이 있다"고 말했다.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영화가 많단 것이다. "언어체계를 거치지 않고 '무엇이다'라고 느껴지는 순간들, 소소한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 전통적인 이론이나 서사중심주의에 기댈 필요는 없다." 구체적 사태들이란 영화의 프레임, 쇼트, 씬, 시퀀스, 빛가 어둠, 인물의 표정과 움직임, 시간성이다. 형상이 아니라 감정의 리듬, 사람들 사이의 힘을 조절하는 감독의 연출력 등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가장 큰 힘이 발휘되기도 한다.
정 평론가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의 감독'을 보여줬다. 유지태가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말하는 그 장면이다. 그는 오랫동안 이 장면의 힘이 남자주인공의 이 발언에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 이 장면을 다시 보면서 여주인공의 '침묵'이 이 장면을 끌고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우리 헤어져." (침묵) "헤어져." 이후 이어지는 침묵. 작별의 단호함이 이보다 더 정확하게 발휘될 수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텍스트가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영화가 구현할 수 있는 것은 '침묵'이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은 "유성영화가 발명해낸 것은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영화는 침묵이 없는 곳(텍스트, 언어적 상태)에서 침묵을 발생시킬 수 있는 곳(물질적 상태)으로 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영화평론은 그 반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영화를 아무리 글로 옮기려 갖은 노력을 해봤자 필연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 정 평론가는 이것을 '절망적 행복'이라고 표현했다. "영화평론가로서 저의 행복은 영화를 아무리 해도 영화에 속할 수 없다는 데 있다. 내 글이 영화를 어떻게 해봐도 영화를 어떻게 하지 못한단 사실이 영화를 쓰게 만든다. 내 글이 영화의 모든 걸 설명할 수 없다는 데서 절망적 행복을 느낀다면 영화 평론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영화를 사랑해도 영화 평론은 영화가 될 수 없는 '불일치', 아무리 그(영화)를 사랑해도 그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역설적으로 평론가로서 자격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절대 겹쳐지지 않는 그것(영화)에 가까이 접근하려 노력하다 보면 제 글의 결함과 오해, 사고, 실패를 맞닥뜨리게 되고 그것들이 제 글을 만든다." 영화평론이란 것이 필연적으로 영화를 100% 재현할 수 없고 실패와 시행착오를 동반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오히려 자유를 얻게 되고,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정 평론가는 영화 안의 '침묵'을 보지 않고 영화를 멀리서 조망하면서 단 몇 가지 범주로 범주화하고 집합화하려는 언어를 불신하라고 강조한다. 평론가는 섣부른 범주화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니라 "영화 속 불투명함과 불합리함을 끌어안고 길을 잃고 망신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작품론'보다 '감독론'에 집착하는 일각의 세태는 옳지 않다. 진정한 창작가는 매 작품을 새롭게 창조하기 때문에 글을 쓸 때도 매 작품을 새롭게 봐야 한다. 감독론으로 손쉽게 범주화하는 것은 평론가 편의의 방식이다.
"영화평론가는 지식의 파수꾼이 아니다. 감각의 지지대가 돼야 한다. 모종의 불안들을 끌어안고 언어들과 함께 감각에 대해 흔들리는 지지대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눈에 구체적인 사태들이 치밀하게 자주 말을 걸어오게 되는 상황을 접하게 된다."
정 평론가는 그러면서 최근 본 외화 중 소위 '빵터졌던' 장면('무비 43' 중 한 에피소드)을 틀어줬다. 거짓 울음은 있어도 거짓 웃음은 없다고 한다. 이 작품은 모든 조건이 완벽한 남자주인공의 목에 남성의 고환이 달려있는 상식 밖의 상황을 통해 관객들로 하여금 즉각적인 폭소를 유발한다. 나도 이 장면을 보며 자동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다. 이후 우린 생각하게 된다. 왜 웃음이 나왔을까. 아마도 감독은 타자의 기형성에 대해 이것이 과연 누구의 문제인지 문제를 제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 때 '웃음'이라는 반응은 즉각적이고 해독에 우선된다. 해석은 그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에서부터 시작된다.
정 평론가는 마지막으로 '영화에 대한 글쓰기'의 실무적인 사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먼저, 영화를 볼 때 졸지 않아야 한다. 영화를 제대로 잘 보는 것이 영화평론가의 기본 덕목이다. 그러지 않으면 절대 오판하지 말아야 할 영화를 오판하게 된다.
둘째, 글쓰기의 문제다. 20세기에 가장 아름다운 산문을 썼다고 평가받는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론'에서 글쓰기에 대해 1) 구성을 생각하는 음악적 단계 2) 조립하는 건축의 단계 3) 이를 짜맞추는 직물의 단계로 설명했다고 한다. 이를 체득한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리고 특별히 '영화평론가'를 꿈꾸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생각하라고 조언했다.
프랑스의 화가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모차르트가 음악을 작곡한 창작 행위에 대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오줌누기와 같았다(It was like wanting to pee)"라고 썼다. 내가 어떤 창작을 하려면, 참을 수 없어야 한다. 누구도 소변을 참을 수 없고, 사랑을 참을 수 없다. 불가피하게 하고 싶은 마음, 글로 옮기고 싶은 참을 수 없는 그 마음이 평론가의 기본이란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남들이 하는 질문에 매달리지 말자고 정 평론가는 말했다. 이거 생각하다간 한 세상 다 간다. 그런 위대해 보이는 질문보다 '난 어떤 영화와 함께 살고 싶은가'를 묻는 게 좋다. 그러면 내가 어떤 글을 쓸지 정해진다.
이후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정 평론가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쓸 때 7 정도의 감각과 솔직함에 3 정도의 이성을 갖추자고 제언했다. 7 정도의 미열을 갖되 글을 쓸 때는 스스로 그것을 누르면서 내가 느낀 느낌들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과정이 필요하단 이야기다.
또 비평가는 어떤 영화를 볼지 말지 결정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탐험할지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영화를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사람, 감별사가 아니라 탐험가가 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젠 말하기도 민망한 추억 같은 것이지만 한 때 영화평론가가 되고 싶었다. 원래 글쓰기를 좋아했고 영화도 좋아했지만 굳이 특정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생각나지 않는다. 대학원에서 잠시나마 이런저런 이론도 뒤적여 보고 졸업 후 영화산업 언저리를 맛봤다. 영화제에서 일한 건 순전히 영화에 대해 더 배워서 나중에 잘 쓰고 싶어서였다.
영화가 직업과 무관해지고 나서도 영화를 좋아했다. 난 영화를 보고 나면 대개 감동하는 쪽이다. 어느 한 순간에라도 매료될 준비가 된 사람처럼. 그래서 영화를 보면 어떤 흥분에 사로잡히고 그걸 글로 써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아무도 쓰라고 시키지 않았는데 왜 혼자 그런 스트레스를 느끼는 건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영화를 보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들, 감정들, 정리되지 않은 그것들을 글로 풀어내야 비로소 감상을 끝낸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게 늘 술술 풀리는 게 아니고, 그 충만한 감각들을 내 비루한 언어로 옮기는 것은 늘 고통스럽고 대부분 실패한다. 그래서 자주 도망쳤다. 바쁘고 피곤하단 핑계로. 근데 내 안엔 거의 항상 원고독촉을 받는 듯한 찜찜함이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부여한 의무감이다.
어쩌면 이게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말한 ‘오줌누기와 같은’ 참을 수 없는 마음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이날 밤엔 오랜만에 마음에 알싸한 파동이 일었다.
영화에 대한 수만가지의 형이상학적이고 현학적인 이론이 횡행한 수상한 시대에 영화의 구체적인 사태들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정 평론가님의 말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진짜 좋은 것, 아름다운 것은 해석이 필요 없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 필요할 뿐이다. 위안과 용기를 주는 강연이었다.
덧. 이 글은 4월12일 트레바리 안국아지트에서 진행된 정한석 평론가의 강연을 들으며 필기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음을 밝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