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매일이 순례자의 길

오늘의 Albergue 찾기

by Soyun

회사를 또 그만뒀다. 아니 뭐 며칠 다녔었나… 기다리던 곳에선 결국 아무 연락이 안 왔고, 불안해서 마음도 없으면서 면접 봤던 곳에 월요일부터 출근을 했었다. 진짜 가기 싫었지만 백수로 있기는 싫어서 출근을 했다. 서울 근처 ‘섬’에 있는 사무실도 그렇고, 뭐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아 아침마다 ‘귀양살이’라고 출근길 닉네임을 붙이고 통근을 했다.



전시회가 있었다. 제품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옷만 예쁘게 입고 인형처럼 서 있는 게 불편했다. 스몰톡만 하면 되는지, 추가 질문에 대해 난 아무 할 말이 없는데… 이제 나흘째 된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하라는 말이 거슬렸다. 잘못된 정보를 아무 말이나 해서 말만 많이 해 보이면 되는 건가…? 잘 몰라서 카탈로그 나르고, 인사 친절히 하고, 선 정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뒤에서 하고 있었는데…애초에 오지를 말걸. 서로 민폐다.



이 바닥이 좁아서 이전 직장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바로 전 직장에서도 부스를 크게 냈다. 부스 번호와 홀을 먼저 확인한 이유는 그쪽으로 가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다가다 마주치는 건 몰라도 일부러 가서 만나고 싶진 않았다. 아침부터 늦은 오후까지 인형처럼 서서 미소만 짓다가 물 만난 고기처럼 파닥파닥 활기찼던 내 모습들이 생각났다. 오히려 말을 너무 많이 한다고 혼났던 그 전시회 모습들이 생각났다. 잠깐 자리를 비우는데 갑자기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척하고 저벅저벅 이전회사 부스를 찾아갔다. 반가운 얼굴들, 살짝 불편한 얼굴들이 함께 보였다. 한 몇 년 전의 나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을 한거다.



“안녕하세요! 커피 좀 줘요, 내가 못 올 데 온 거 아니잖아요?” ^^



반갑게 맞이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정성스레 ‘말아 준(?)’ 부장님 덕분에 분위기가 좋아졌다. 그리고 꼭 인사를 해야 할 사람도 만났다. 그만둘 때 제일 인사를 하고 싶었던 사람인데 출장을 가는 바람에 끝인사를 직접 못 하고 나왔었다. 다행히도 오늘 부스에 나와 있었다. 기대하고 간 건 아니었지만 매우 반가웠다. 간단한 안부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친정’에 다녀온 느낌이 들었다. 내가 퇴사한 직장들을 ‘친정’처럼 느낀 적이 있었…던가? 딱히 불편하게 한 일은 없었지만, 웬만하면 평생 다시 안 마주쳤으면 하고 바란 적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한 번 경험하고 나니 세상 그렇게 딱딱하게 살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갈까 말까’를 수 십 번 생각했던 그 고민이 불필요했다고 느껴졌다. 반가우면 찾아가면 되는 거고,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괜한 자존심을 부릴 필요도 없었다. 덕분에 그 타이밍에 만날 사람도 다시 만나 못 다한 인사를 나눴고, 오히려 안 갔으면 어쩔 뻔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회자정리 잘 했다.



요즘 하루하루가 다이나믹하다. 산티아고를 가 본 적도 없는데 ‘까미노 블루’가 찾아와서 틈만 나면 순례길 유투브, 책만 본다. 산티아'go'를 너무 가고 싶은데, 지금 아무 생각 없이 떠나면 분명 생활'go'에 시달리겠지…라는 생각에 답답해서 서울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걷다가 생각이 난다고, 갑자기 산티아고까지 갈 거 없이 나의 매일이 순례길이구나 싶었다. 나중에 시간도 돈도 여유가 되면 분명 난 그 길을 떠나겠지만, 지금은 조금 현실적으로 나를 땅에 붙들어 매야 하니까.



아침에 고민했던 일이 저녁 때쯤 어느정도 해결이 되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했다. 하루에 두 군데의 Albergue에서 묵을 수 없듯이 하루에 하나씩만 고민하기로 했다. 예전엔 성당에 가도 5년 후, 10년 후의 비전까지 놓고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기도를 했는데, 요즘엔 뭘 기도해야할 지조차 몰라서 ‘오늘의 Albergue를 잘 찾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 교회를 다닐 때, 우스갯소리로 ‘나 요즘 힘들어’ 이런 표현을 요즘 ‘광야를 지나고 있어’ 이런 말로들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이제 그 표현대신, 나의 매일 매일이 언젠가 다다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향한 순례자의 길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광야’는 언제 끝나나만 생각하게 되는데, 내가 걷는 순례자의 길은 산티아고에 다다르기까지 다 소중한 과정이지 않을까. 마음으로 이렇게 예습을 했으니, 몇 년 후에 진짜 산티아고에 가게 되면, 더 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또 마음이 급해지긴 했지만, 욕심을 내려놓고, 하루에 하나씩만 해결하면서 살기로 했다. 오늘 평온하고, 내가 몸 누일 집이 있고, 맛있는 한 끼 먹었으면 최고의 Albergue니까. 오늘도 잘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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