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잘 못 되고 있다
좁쌀만 한 입술포진이 다다다닷 올라왔다. 몸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심할 때 ‘고생이 많다’ 다른 사람들에게 티 좀 내라고 몸이 보내는 일종의 신호이다.
그런데 나 지금 백수인데? 놀고먹는 게 일인데? 포진이 왜 거기서 나와?
알바의 빌런
우아하고 고상한 백수의 날들일 줄 알았다. 열정과 패기가 넘치는 시간들 일 줄 알았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생활에서 알람을 완전히 꺼버렸다.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싶으면 책을 펴기만 하면 되었다. 평일 낮의 카페를 즐겼다. 요금이 가장 저렴한 요일에 비행기 티켓을 끊고 중간중간 들어오는 업무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여행을 2주쯤 다녀왔다.
오전에 4시간 정도 알바를 하면서 생활비를 충당하고 오후에는 글도 쓰고 공부도 하는 백수 제2막을 시작하려고 했다. 그러나 돈 쓰는 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었지만 돈을 버는 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알바 이력서를 50군데쯤 넣어서 딱 3 군대 면접을 봤다. 다 떨어졌다. 심지어 한 곳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면접은 형식적인 것처럼 말했는데 떨어졌다. 다른 한 곳은 공공기관이었는데 ‘컴퓨터 활용 자격증은 없나요?’라고 물었다. 아니 내가 10년 동안 사회생활하면서 매일 엑셀에 파워포인트로 작업을 하고 그 내용이 경력증명서에 빼곡히 적혀 있는데 자격증이 한 줄이 더 중요하다니… 허탈했다.
결정적 한방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알바를 구하지 못해 찡찡거리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자기 회사에 알바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제안한 업무가 내가 해본 적이 없는 업무였다. 하여 친구가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동안 내가 독학으로 공부를 하고 테스트를 해본 후 결정하기로 했다. 공식적인 면접이 아니라 토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해외 출장을 다녀온 다음날 나를 위해서 시간을 내준 것이다.
비밀 면접을 며칠 앞둔 오늘, 아는 동생이 토요일 저녁에 1박 2일로 놀러 가자고 제안을 했다. 온천이 있는 호텔이고 심지어 숙박비가 무료라고 해도 거절을 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난 그런 이성적인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못한다.
오히려 친구에게 면접시간을 당기거나 단축시킬 수 있는지 물어봤다. 카톡을 보내자마자 후회했다. 보내지 말지. 후회나 하지 말던가. 에휴. 친구에게 답장이 왔다.
친구 : 뭐야 뭐야
나 : 그지… 좀 그렇지? / 아니야… 없던 걸로 하고 신경 쓰지 마요
친구 : 알겠어~~ 너 어디 가는데?
나: 누가 어디 가자고 해서 갈까 하다가… 그래도 면접이 먼저지… 내가 정신 못 차렸네~~
친구 : 그래 정신 못 차렸네 ㅋ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내가 너무 한심해서 참을 수 없었다. 사리분별 못하는 애송이가 된 것 같았다. ‘그럴 수 있지’ 정도 답변이 올 줄 알았는데 내가 한 말이 그대로 돌아와 비수처럼 꽂혔다. 나를 얼마나 한심하게 생각할까? 그래도 나름 사회생활하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이런 처사에 실망을 했을 친구가 그려졌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닌데… 그런 사람 아닌데…. 오해와 편견의 시선을 가질 까 봐 걱정되었다.
누군가 그랬다. 잠들기 전에 찝찝한 것이 없다면 행복한 것이라고. 그렇다면 오늘 나는 단연코 불행하다. 나는 왜 이것 밖이 안되는지 화가 났다. 마음을 추슬러보려 해도 좀처럼 정리되지 않았다. 진정한 이불 킥이 밤이다.
단단히 착각하고 있었다
나 정도 사회 경력이면 이 정도 단순 업무는 뚝딱이지. 10년 허투루 일했겠어. 내가 이런 일 할 사람이 아닌데 그냥 돈 조금 받고 알바처럼 하는 거지. 오만함에 사로 잡혀 있었다.
내 경력은 온라인 마케팅 분야의 경력이다. 문서정리가 주 업무인 기업에서 나를 판단하기 위한 지표는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이 더 필요한 것이 맞다. 인사업무 보조, 경영지원팀 보조, 문서 업무 보조, CS 보조…. 보조라서 편할 것 같다는 생각만 했지 내가 저 업무 중에 내세울 만한 업무 경력이 없다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사회 경력이 있는데 ‘보조 업무 하나 못 하겠어?’라는 건방을 떨었다. 그리고 ‘보조’ 업무를 시키기엔 내 나이는 오히려 부담스러운 나이였다.
생각해보면 친구에게 나는 늘 막냇동생 같은 철부지였다. 언니처럼 챙겨주고 도와주고 가끔 혼도 났다. 물론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행동이었지만 실망하고 오해했을 경우보다 ‘여전하네’ 하고 넘어갔을 확률이 더 높다. 애초에 나는 똑 부러지는 이미지는 아니었다. 나는 원래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뭘 그리 안달볶달하나. 생각을 바꾸자 마음이 편해졌다.
나 혼자 착각에 늪에 빠져 ‘나 정도’라는 어이없는 기준치를 잡고 뻣뻣하게 굴고 있었다. 회사 안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되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온 업무였고 그 분야에서 나는 프로였기 때문이다.
회사를 나오면서 스트레스, 압박, 책임감에서만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보장받던 ‘사회적 위치’도 함께 놓아 버렸다는 것을 늦게 깨달았다.
현재는 울타리에서 나와 정글에 입성한 벌거벗은 애송이다. 새로운 시작과 도전에 있어 좀 더 맹목적이고 간절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