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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작가 Apr 07. 2020

조금은 특별한 오렌지 주스

> 세비야에서 만난 ‘여유’라는 첫 맛

세어보니 열흘째 립톤과 코카콜라만 마셨다. 준비운동 없이 시작한 민박일이 고되어 입맛을 잃는 전례 없는 일이 발생했다. 처음 며칠은 캔으로 사다 놓고 집에서 먹다가 다른 것이 먹고 싶어 집 앞 Restaurantes(세비야의 모든 식당은 식사시간이 아니면 음료만 마실 수 있다)에 나갔는데, 그 곳은 별도의 음료 메뉴가 없었고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냉장고에 보이는 코카콜라와 립톤을 쭉 마시게 되었다.


루틴이 제법 몸에 익었는지 평소보다 낮잠 시간이 줄어 일찍 깼다. 다음 체크인까지 시간 여유가 있어 구시가지로 마실을 나갔다. 세비야에 오고 최장거리 외출이었다. 그날은 늘 그렇듯 째지게 더웠고 나는 먹은 것이 없어 약간의 어지럼증이 일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아는 메뉴’로 나를 맞아 주는 스타벅스로 들어갔다. 아메리카노를 먹을까 캬라멜마끼야토를 먹을까 고민하던 차에, 지잉지잉. 소음이 나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시선이 머문 곳에는 오렌지가 줄 맞춰 데구루루 굴러 내려 가고 있었고 그 끝에는 진노랑 오렌지 주스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거다! 오늘의 당 충전은 오렌지 주스로 정했다. 


1개, 2개, 3개….7개! 무려 7개의 오렌지가 빨려 들어가 투명 플라스틱컵을 가득 채웠다. 찰랑 찰랑. 단 하나의 얼음도 넣지 않았지만 넘칠 까봐 뚜껑도 닫지 못한 오렌지 주스는 내 손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생과일 주스란, 약간의 생과일과 다량의 시럽과 무자비한 얼음이 들어간 비싼 음료 아닌가. 오렌지 7개를 5유로가 안되는 (그란데 기준) 금액으로 마실 수 있다니. 자본주의의 상징 스타벅스에서 인류애를 본 순간이었다. 


태양이 뜨거워 과일의 당도가 높고, 가로수도 오렌지 나무일 만큼 오렌지가 많이 나고 맛있는 스페인이지만, 그렇다고 오렌지를 오렌지주스를 처음 먹어보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 날의 오렌지 주스는 왜 그렇게 감격스러웠을까?


그 날은 경주마 같던 시간을 지나 처음 기지개를 켠 날로 기억된다. 쏟아지는 햇빛아래 반짝이며 지나다니는 트램. 역사의 아름다움을 끌어안은 대성당의 자태. 쉼표가 없는 스페인어의 리드미컬함. 카페테리아 야외 테이블 밑에 잠들이든 강아지의 나른함. 오렌지 주스와 마주 앉아 세비야를 천천히 음미했다. 그 때의 오렌지 주스는 새로운 일상에서 만난 첫 ‘여유’의 맛이었기에 더 특별하게 남아있다.



>나에게 너무 스페인 스러운 단어 Zumo de Naranja

오렌지 주스는 스페인어로 수모 데 나랑하(Zumo de Nranja)라고 읽고 쓴다. 스페인어는 영어 알파벳과 동일한 표기법을 사용하지만 그 만의 독특한 발음이 있어 참 매력적이다. ‘H’는 묶음이고(Hostal은 ‘오스딸’로 읽는다), ‘J’는 ‘H’발음이 나며(Jamon은 ‘하몽’이라고 읽는다), ‘Z’는 ‘S’ 발음이 난다(Zaragza는 ‘사라고사’라고 읽는다).


처음으로 오렌지를 사러 슈퍼에 갔을 때 일이다. Naranja(오렌지)만 달달 외워 슈퍼를 갔다. 분명히 담겨있는 건 오렌지인데 겉포장지에 대문짝 만하게 ZUMO라고 써져 있는 것이 아닌가. 오렌지랑 뭔가 다른 종이 있는 것인지 아리송 했다. 마침 옆으로 다가온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거 ‘주모’라고 써진 것 오렌지 맞아요?” 라고 묻자, 할머니의 웃음이 터졌다. 아차. 앞에서도 말했듯이 Z는 S발음이 나니까 ‘수모’라고 했어야 했는데 ‘주모’라고 발음한 내 덕에 슈퍼마켓 안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러니까 주스 전용 오렌지라는 표시였다. 할머니가 알려준 건 아니고 눈치상 오렌지가 맞는 것 같아 후다닥 사고 집으로 돌아와 사전을 찾아서 얻은 답이었다. 


부끄러운 해프닝과 함께 직접 부딪혀서 배운 단어이기도 하고, 영어와 달라서 새롭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식 발음이 각각의 단어에 들어가니. Zumo de Naranja는 나에게 너무 스페인 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절대 ‘Zumo’를 ‘주모’라고 읽지 않았고 스타벅스에 가서도 ‘Orange juice’가 아닌 ‘Zumo de Naranja’를 달라고 했다. 이쯤 반복 했으면 이글을 읽는 그대도 입에 붙는 정겨운 스페인어가 생겼음이라 조심스럽게 기대해 본다.


그대여, 스페인에서 Zumo de Naranja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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