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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작가 Apr 09. 2020

어제와 같아서 감사한 오늘

“큰딸 보고 싶네”


역시 가족은 눈에서 멀어져야 애틋해진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빠의 생경한 애정표현이 당황스럽지만 싫지 않다. 평소라면 1분 이상 대화가 힘들고 그 마저도 대부분 나의 분노 게이지 상승으로 마무리됐었는데. 세비야에 와서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통화는 역시나 1분을 넘기기 힘들지만 간지러운 인사로 끝나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애틋한 마음의 부작용이 있었으니 약간의 과대망상증이 동반된다는 것이다. 포털 사이트 메인이나 페이스북을 장식하는 사건 사고들. 한국이었다면 안타까운 마음으로 대했을 텐데 이역만리 타지에서 만난 그 일들은 어쩌면 우리 가족의 일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으로 마주하게 되었다.


아빠는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어디 건설 현장에 사고가 났다는 기사만 봐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자동차 사고 기사를 보면 가족들이 자주 다니는 곳인지 확인하게 되었다. 매일 들어가는 포털 사이트 상단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건 사고 기사가 떴고 그 불행이 나의 몫일 까 봐 매일 두려움에 떨었다.


엄마가 배를 타고 백두산을 가면 배가 가라앉을까. 동생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가면 비행기가 떨어질까. 온갖 ‘만약에’를 풀가동하며 불안의 씨앗을 키웠다. 감사하게도 내가 걱정하거나 상상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늘 그렇듯이 출근하고 퇴근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TV를 보다 잠드는 비슷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아침 7시에 일어나서 9호선으로 갈아타기 쉬운 6-3번 칸에 몸을 싣고 선정릉역 5번 출구로 나간다. 모닝 카페인을 한잔 사는 것으로 하루 일과가 시작된다. 책상에 앉아 마우스를 때려 부실 듯이 내려치기도 하고 동료의 옆자리로 의자와 함께 굴러가 위로의 수다를 떨기도 했다.


재수가 좋으면 6시에 운이 없으면 9시쯤 퇴근을 한다. 선정릉 5번 출구로 내려가 4호선으로 갈아타기 좋은 9-3번 칸에 몸을 집어넣고 집으로 돌아가는. 대부분 그런 하루를 보냈다. 친구를 만나는 것조차 지쳐하는 그런 날들의 반복.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다.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에서 이탈하고 싶었다. 나에게 일상은 별 볼 일 없는 그저 그런, 지루하고 벗어나고 싶은, 하루의 연속이었다. 신나는 별일을 찾아 헤맸고 찰나의 기쁨으로 지겨운 일상을 위로하곤 했다.




그런데 세비야에 살면서, 그러니까 가족과 떨어져 살게 되면서부터 ‘일상’, ‘반복’, ‘별일’이 다른 개념으로 정의되었다. 그저 사건 사고 없이 같은 곳으로 출퇴근하고, 늘 걷던 거리를 걷고,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는 일. ‘별일 없이 산다’라는 말이 다르게 다가왔다.


일상의 답답함을 벗어나고 싶었고 특별한 하루를 꿈꿨다. 드라마틱한 행복이 오지 않음을 비관했었지만 지금은 드라마틱한 불행이 닥치지 않음을 감사하게 되었다. 어제처럼 무사히 지나간 오늘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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