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o : 미친, 정신이 나간
민박집에는 항상 여행자만 오는 것은 아니다. 어학연수 시작 전에 잠시 머물기도 하고, 학회 및 세미나 참여를 위해 오기도 하는데, 박 사장님과 김 상무님은 지브롤터에 중장비 수출을 위해 사업차 우리 집에 머물게 되었다.
아버지 또래의 어른이시라 많이 긴장했었다. 손이 영글지 못한 30대 싱글이 차려주는 아침밥은 한국의 밥상보다 당연히 부족할 텐데, 사장님 두 분이 머무는 동안 대부분의 숙박객들은 20대 초반 대학생들인데 서로 불편하지는 않을지, 이런저런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다행히도 두 분은 놀랍도록 호탕하셨고 자칫 어색할 수도 있는 아침 식사 시간을 유쾌한 대화로 리드하셨다.
두 분은 ‘소주’를 참 좋아하셨다. 틈만 나면 한국에서 고이 모셔온 소주를 들고 거실로 나와 술판을 벌이고 싶어 하셨다. 처음에는 안주도 만들어 드리고 말동무해드렸다. 그런데 ‘소주’를 찾는 빈도수가 잦아지면서 ‘여자 혼자 민박집 한다고 이러시나?’, ‘도라에몽 바구니라도 있는 건가. 저 놈의 소주는 왜 계속 나오지?’ 날을 세우게 되었다. 계약 문제가 생겨 예정된 일정보다 체류가 길어지면서 다행히 소주는 동이 났다.
박 사장님이 지브롤터를 한번 더 다녀오시면서 문제는 일단락되었고 계약은 성사되었다. 축하도 드리고 싶고 소주 드실 때 살짝 싫어했던 마음이 죄송해서 마지막 식사는 같이 하고 싶었는데 저녁 늦게 체크인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대신 가장 좋아하는 식당을 소개해 드렸다.
그런데 그곳에 소주를 가져가서 소맥을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외부에서 술을 가져가는 것은 문화가 달라 음식점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니 자제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고 소주를 구할 수도 없다고 했다. 실은 중국인 식료품 점을 가면 되는데 거짓말을 했다. (당시 세비야에는 한식당이 없었다) 소개해준 식당 점원들과 알고 지내는 사이인데 혹여나 사장님들이 불편한 상황을 만들까 걱정이 되어 차단을 한 것이다.
그날 밤, 두 분이 들어오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잠들었다. 다음날 여느 때처럼 밝은 아침 식사 분위기를 주도하였고 다시 세비야를 오면 꼭 들리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떠나셨다.
며칠 후 두 분 사장님이 마지막 저녁을 드셨던 그 식당을 찾았다. 오랜만이라며 대니가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음식이 다 나왔을 때쯤 대니가 말을 붙였다.
“얼마 전에 한국인 늙은 남자(올드맨) 두 명이 왔었는데 엄청났어”
“세상에 맥주랑 양주를 섞어 먹더라니까”
순간 머릿속에 사장님 두 분이 스쳐 지나갔다. 아… 소맥을 막았더니 양맥으로 응수하실 줄이야. 한국인 흉을 보는 건가? 한국인은 왜 그러냐며 한국인인 나에게 한탄을 하는 것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나를 보고 대니가 말을 이어 갔다.
“섞어서 여기저기 다 나눠주고, 그래서 나도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던데!”
“어떻게 그 독한 술을 섞어 마실 수 있지?”
“한국 사람들은 너무 재미있어”
“완전 미쳤어. 로꼬 코리안”
그제야 무용담을 얘기하듯 신난 대니의 얼굴과 몸짓이 보였다. 바에 있던 다른 직원이 엄지를 치켜 보였다. 나는 무엇을 걱정했던 것일까? 두 아저씨가 폭탄주를 먹으며 무례하게 굴거나 취해서 실수를 할 것이라고 넘겨짚었던 것 같다. 아니면 알코올 쓰레기인 나는 주당들의 환희의 경지를 경험해보지 못해. 그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은 나쁜 것이라며 선을 그었던 것일지도.
정확히 꼬집을 순 없지만 편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편협했던 내가 부끄러웠고 편견 없이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고 즐기는 그들이 고마웠다. 식사를 무르익을 때쯤 대니가 물었다.
"로꼬 코리안들이 남기고 간 양주가 있는데, 마실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