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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만의 취업

육아와 경제 활동+장애

by 해산

2022년, 대학원보다 더 힘들었던 사이버대학에서의 언어치료 공부를 마치고 후련함이 컸지만 한편으로 불안이 밀려왔다. '이제 어디서 내 우물을 찾지?'

10년 가까이 가사, 육아에 더하여 아이들의 발달을 지원하기 위한 과업에 전적으로 매달려 있다가 혼자만의 공간에서 배우고, 글을 쓰고, 타인과 부담스럽지 않게 소통하는 시간이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더불어 집에서 하는 일은 뚜렷한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반해 공부는 노력의 결과가 성적으로 산출되어 눈에 보이는 결과가 있으니 보상을 받는 기분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소망하고 노력한 일에 대한 결과. 그것이 어느 정도 만족스럽게 내 마음을 채워주기를 갈망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다시 집에서 아이들만 바라보고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발달에 목매며, 더딘 결과를 위해 노력을 쏟아부으면서도 좋은 소리 못 듣고 늘 부족한 점에 대한 언급이 들려오는 일상에 지쳐 있었다. 아이가 하게 된 어떤 성취 뒤에 놓인 뼈를 깎는 인내와 희생을 배려하기에는, 사회가 아직 빠듯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아이들과 나의 인생을 오롯이 직면하고 설계해 나갈 만큼의 안정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 같다(지금은?).




그 무렵 훈이 언어치료 수업을 받으러 다니는 집 근처 복지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우연히 구인 공고를 보게 되었다. 내용은 언어치료사 급구. '주 2회 정도 내가 원하는 시간에 근무할 수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태어나 40년 넘게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었던 직업, 언어치료사. 아이들의 발달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었지,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 공부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기존 직업에 재진입 시도도 해보았지만 시간을 맞추기 힘들었다. 직업을 결정하는 주요 변수가 '우연'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연이 나의 필요와 절묘하게 만나 상상치 못했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른 저녁까지 일을 마친다고 하더라도 오후 시간에 아이들을 잠시 맡길 곳이 있어야 했다.

동네에 '키움센터'라는 돌봄 시스템이 있었다. 당시 훈은 일상생활 기능이 많이 안정되어 있었고, 동생을 잘 챙겨서 믿음이 갔다. 또래 간 오해나 갈등이 걱정이었지만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활동을 할 수 있는 돌봄 시설에서 스트레스받지 않고 일정 시간만 머물다 오는 건 가능할 것 같기도 했다. 생글생글 웃으며 아이나 어른 구분 없이 "귀여워!!"를 남발하며 애교를 피우지만 의사소통이 제한적이며 고유수용성 감각 추구* 위주의 놀이를 하는 찬이 걱정이었다. 무던하고 끈기 있는 형에 비해 감정적으로도 더 민감하고 학교 입학 후 감각 추구 행동이 두드러진 상황이었다.


'괜찮을까?'

특수 교사가 없는 일반적인 보육 시설에서 찬이 잘 적응할지 걱정이었다. 영유아 시절 특수학교와 장애통합어린이집을 다녔고, 학교에서도 특수교육대상자로 지원을 받아왔기에. 정체 모를 압도적인 불안이 나를 짓누르는 가운데 일을 시작했다. 다행스럽게 찬은 선생님들의 애정을 받으며 별다른 이슈 없이 잘 지냈다. 안심할 무렵 사건이 하나 터지긴 했지만….

이동 과정에서 실종되었다가 경찰차를 타고 해맑은 표정으로 짠 하고 나타난 작은(?) 사건이었다. 그때 아이가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고 기도하는 중 아무 일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었다. 아이는 천진난만하게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며 건물 엘리베이터를 타고 좋아하는 4층에도 올라가고, 지하철역 근처를 이리저리 배회하던 중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나쁜 아저씨도 있다는 사실은 알 리 없이 신고를 받고 차로 동네를 돌며 도로변을 유심히 살피던 착한 경찰 아저씨를 만났다.

그 후로도 찬의 실종 사건은 몇 번 더 반복되었다. 동네 지리가 만만해졌지만 본인의 하루 일과에 대한 개념은 채 형성되지 않은 시기였다. 전화를 받고 대화하는 것에도 어려움이 있던 때여서 마음을 졸였다.

찬이 점차 날짜 개념이 생기고 정해진 일정에 따라 이동해야 함을 인지하게 되면서 갑자기 사라지는 사태에 대한 염려도 한시름 놓게 되었다.


12년 만에 직업 세계에 뛰어들어 설렘과 기대에 부풀기도 했다. 외모를 단정히 가꾸고 또 다른 나의 공간에 출근하여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누군가를 바라보고 알아가고 돕는 기쁨. 결혼 후 긴 시간은 결코 경력 단절이 아니었다. 경력의 공간이 이동했을 뿐! 학교에서 배운 공부 이상의 몸에 밴 경험적 지식들은 직업 세계에서도 통했다. 그중 장애가 있는 아이를 길러본 경험은 수업과 부모 상담에 도움이 되는 면이 더 크긴 했지만 극복해야 할 약점으로 작용하는 측면도 있었다. 바로 역전이.

'역전이'라는 용어는 보통 상담 장면에서 상담자가 내담자(상담을 받는 사람)에게 과거의 타인에게서 느꼈던 유사한 감정을 느끼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어 상담자의 아버지가 권위적이고 지시적인 사람이었다고 가정하자. 상담을 하는 도중 내담자가 그런 아버지와 비슷한 면모를 자주 보인다. 상담자가 과거 아버지에게 가졌던 감정을 유사하게 느껴 내담자를 대하면서 거부감이 들거나 만남을 피하고 싶어 진다면 역전이가 일어난 것이다.

상담은 아니지만 수업 외 시간에도 풀리지 않는 사례가 내내 머릿속을 맴돌아 고통스러울 때가 있었다. 치료 방향에 대한 마땅한 연구 이상의 지나친 감정 이입으로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적정 수준의 에너지 분배, 내가 고민해야 할 범위의 설정과 내려놓기 연습이 필요했다. 부모 상담 시에도 보호자의 모습 속에서 과거의 나 자신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 자칫 내 감정으로 착각하여 내가 받고 싶은 위로나 해결책을 제시해선 안되었다.




내가 없는 일정 시간 동안 지역 사회에 아이들 맡기기! 큰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고 중간중간 크고 작은 삐그덕거림도 있었다. 그러나 처음 가졌던 불안만큼의 엄청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결국 내가 세심하게 봐줘야 하는, 누구에게 맡기기 어려운 구멍들이 눈에 띄기도 한다. 일하는 시간이 보람 있는 동시에 해줄 것이 많은 아이에게 관심과 정성을 덜 쏟아 5만큼 끌어낼 수 있는 아이의 가능성을 2에서 머물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놔두면 스스로 놀이하고 확장하고 소통하고 독서하는 또래 아이들 같지 않으니, 옆에서 잘 관찰하고 유도해줘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사회적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전개되기란 어렵다. 물론 그런 환경 속에 아이들이 노출되며 배우는 것도 있고, 내가 줄 수 없는 좋은 자극을 받는 면이 있기도 할 터.


목에 걸린 가시처럼 까슬거리는 불안과 죄책감 사이 어디메쯤 같은 마음과, 내 능력을 발휘하고 금전적 보상을 받는 직업 활동을 지속하고 싶은 마음이 늘 격렬하게 부대꼈다. 내가 이럴진대 어디에 맡길 엄두조차 못 내는 아이를 길러내고 있는 양육자는 어떨지… 그런 경우 육아는 곧 그의 직업이자 삶이 된다. 아이가 학교에 간 시간은 양육자가 한숨 돌리고 충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돌봄의 난이도가 높다는 이유로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구하지 못하는 중증장애인 가정에 지원사 급여의 일부 금액을 한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들었다. 국회에서 계류 중인 중증장애인 가정의 가족 간 활동지원급여 인정 법안이 속히 통과되기를 바란다. 어떤 부작용이 걱정되어 오랫동안 논의만 분분한지 몰라도, 요양보호사도 직계 가족 돌봄이 인정되는데 평생을 가족 돌봄에 헌신하는 장애인 가정만 외면하는 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본다. 염려되는 악용에 대해서는 차단할 수 있는 체계를 세워나가면 되지 않을까?


지금도 난 주 양육자로서의 최선의 집중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나의 역량을 발휘하고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그 두 영역이 서로 상충하지 않고 조화롭게 엮여 일상의 양 바퀴가 되어 굴러가는 꿈이 현실이 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용어 설명

*고유수용성 감각 추구: 근육과 관절 등에 자극 감각을 추구하는 것으로 트램펄린 뛰기, 언덕 오르기, 산 오르내리기, 장난감으로 얼굴이나 목 톡톡 두드리기 등의 자극 행동을 반복하였다. 이런 경향은 늘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없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환경이나 스트레스 정도에 따라 증가나 감소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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