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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산 Aug 15. 2024

집단무의식의 호수에 던지는 돌멩이들

잔잔한 파문에서 큰 파문으로 이어지다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 Disorders).

이 진단명을 들었을 때 드는 첫 느낌, 혹은 떠오르는 장면은 무엇인가? 왠지 모를 무게감?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접했던 배우의 연기? 주변에 있는 장애 당사자의 모습? 책상, 나무 같은 보통 명사를 듣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면 99.9%가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할 것이다(실제로 말한다).

 

하늘이 무너진다.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 때 흔히 쓰는 이 관용적 표현.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숨 쉴 수 있는 공기가 다 사라지고, 질식사하고 만다. 모든 희망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느낌이라는 거다. 나와 상관없는 일일 때에는 보통 명사처럼 느꼈던 용어임에도, 느닷없는 공포와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한자로 자폐(自閉)는 스스로 갇혀 있다는 의미이다. 자폐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넓은 범주의 진단명이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으로, 서툴지만 조금씩 배워가는 아이에게 ‘너는 스스로 갇혀 있는 아이야.’라고 규정하고 싶지 않다. 설령 스스로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자폐인이 있다고 해도, 타인의 시선에 의해 갇혀 있는 사람이라고 칭해지고 싶을까? 내가 나를 잘 모르는 누군가에 의해 ‘이러저러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얻고 싶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일 거다. 다만, 그들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를 알아차리기 어렵거나 의사소통에 서툴러 표현하지 못할 뿐. 진단명의 번역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

   

첫째 아들 훈은 우량아였다. 태어났을 당시에는 조리원에서 가장 작은 아이였지만 금세 쑥쑥 커서 3개월 무렵 10kg을 돌파했다. 둘째와의 첫 기억은 흐려진 장면들이 많다. 반면 첫째와의 첫 기억은 대부분 선명하다. 첫 배냇짓, 첫 웃음소리, 첫 뒤집기, 첫 걸음마, 첫 신발 신은 장소까지! 입었던 옷, 아이의 표정, 주변 풍경들…생생하다. 둘째가 덜 사랑스러워서라기보다, 더 여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고생한 만큼 자연스레 좇아오는 발달을 누리면 된다고 여겼으니까. 마치 당연한 권리처럼.

     

대상 영속성*1)이 발달하는 까꿍 놀이도 좋아했고, 먼저 천을 들고 와서 놀이를 시도하기도 했다. 눈을 마주치면 길고 귀여운 눈매가 초승달 모양이 되며 하얀 웃음꽃이 활짝 피던 표정. 공 주고받기 놀이를 하는 7개월 무렵의 영상을 보면,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무거운 용어를 떠올리기 힘들다. 내가 대학원에서 뇌신경 발달장애 군의 특징을 공부할 때는 DSM-Ⅳ*2) 판으로 했기에, 뇌신경 발달장애가 전반적 발달장애, 아스퍼거, 자폐증, 소아기 붕괴성 장애 등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그리고 상담사로 일하며 폭넓은 발달장애의 증상을 접하지는 못했으므로 ‘전반적 발달장애’의 분류에 해당하는 임상 증상에 대한 감이 없었다.

   

그래서 늘 긴가민가했다. 주고받는 대화 기술이 발달하지 않고 특이한 말을 반복하는 모습을 보아도, 의지에 따라 눈을 맞추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비일관적인 모습을 봐도, 다른 발달의 모습을 지켜보며 내가 알고 있는 ‘자폐증’이 아니라 여겼다. DSM-Ⅳ의 자폐증은 전형적인 자폐증의 특징을 가졌을 때 내리는 진단명이기에 ‘자폐’의 증상을 폭넓게 바라볼 수 없었다. 만 2~4세 사이 자녀를 처음 언어 치료실에 데리고 오는 보호자들도 비슷하다. 긴가민가 상태인 경우가 흔하다. 병원에서 검사해도 어린 나이라 진단명이 나오지 않는다. 

'자동차를 일렬로 줄 세워서 혹시 자폐인가 했는데, 부르면 잘 돌아보고 눈도 잘 맞춰서 아닌 것 같아요.' '얘를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할지, 없다고 봐야 할지 모르겠어요.'

‘자폐증’이 아니라 ‘자폐 스펙트럼’에 해당할 수 있다. DSM-5에서는 뇌신경 발달장애의 세분된 진단명을 싹 끌어모아 ‘스펙트럼’이라는 단어 안에 녹여버렸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7가지 색으로 나뉜다. 다시 흐린 빨강, 중간 빨강, 진한 빨강, 흐린 주황, 중간 주황 등, 수없이 다양한 색으로 나뉜다. 그와 같이 ‘자폐’라는 하나의 특징도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과 강도로 증상이 나타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자폐인은 눈도 잘 맞추고 사람을 좋아한다. 의사소통 능력도 어느 정도 갖췄다. 그런데 의사소통 기술이 취약해 자기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말하려고 한다. 또 어떤 자폐인은 말로 소통하기가 어렵다. 간단한 수어를 배워 원하는 사물을 요구하는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상대를 바라볼 때 눈을 맞추기 어렵고 먼 산 바라보듯 시선을 둔다. 그 외에도 다양하다. 내가 아는 자폐인에게는 있는 증상이 다른 자폐인에게는 없을 수 있다. 지적 장애, ADHD 등 다른 뇌신경 발달장애가 공존하기도 한다.


‘자폐 스펙트럼’의 공통적 특징이 있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질적인 어려움, 의사소통의 어려움, 행동의 특이성(제한된 관심사나 반복되는 행동 등)이다. 특정 감각*3)의 회피나 추구도 흔하게 나타난다. 그 특징이 개개인에 따라 매우 광범위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훈이 만 4세 무렵 대학병원에 갔을 때는 ‘자폐는 아닌 것 같은데 특수 교육이 필요할지 모르니, 일단 언어와 인지 치료부터 시작하라.’라는 소견을 들었다. 만 7세에 다른 대학병원 의사는 1분가량 아이와 대화를 시도하더니, 한마디로 정리했다. “자폐 스펙트럼입니다.” 진단명이 새로워졌고, 증상의 분류 방식이 바뀌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개인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몰아넣은 듯한 분류 방식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신경 발달장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 않은 이상 ‘자폐’라는 말을 들으면 전형적인 자폐증의 대표적인 증상 몇 가지 정도를 떠올리는 편이다. 내가 아는 ‘자폐’의 의미와 상대방이 아는 ‘자폐’의 의미가 다르다. 누군가에게 진단명을 말하기 꺼려지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근시라서 안경을 맞춰야 한다네요.’라고 말했을 때 화자와 청자가 이해하는 ‘근시’의 의미가 같다면, ‘자폐’는 전혀 다른 뜻으로 전해질 수 있다. 그래서 진단명보다는 아이의 특성을 말하는 데 초점을 둔다. ‘스펙트럼’이라는 진단명으로 개정한 이유는 지원의 범위를 넓히기 위함일까? 만약 그렇다면 아직 우리나라에서 그런 깊은 뜻이 통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미국은 그게 가능해서 그렇게 개정했는지도 모른다.


스펙트럼화된 ‘자폐’는 ‘정체성으로 볼 것인가, 장애로 볼 것인가?’의 질문을 낳기도 한다. 경도의 자폐인을 그저 독특한 성향을 지닌 사람으로 볼 수 있는가 하면, 중증 자폐인은 정체성으로만 보기에는 일상에서 부대끼는 어려움이 많아 보일 수 있다. 내 생각은 두 가지 면을 다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가진 고유한 정체성으로 보는 관점과 어려움에 대해서는 지원할 수 있는 관점, 두 가지 모두 필요하다. 바로 존중과 배려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필요로 하는 그것이 뇌신경 발달장애인들에게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들 각자의 눈높이에서.


진단명이 주는 공포와 충격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자폐(自閉)’라는 번역도 변화가 필요하지만, 그 말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자폐인을 존중과 배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문화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살아오면서 자폐인이 존중받는 장면을 본 기억이 없다.’, ‘학급에 비슷한 학생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학습이나 사회성 지원을 받는 일이 일어난 적이 없다.’, ‘미디어에서는 웃음거리로 묘사되거나 금전적 후원의 대상으로 주로 등장한다.’ 우리의 깊은 마음속에 발달장애인에 대한 집단무의식*4)이 자리할 수도 있다. 다시 오랜 세월 후에, 우리의 집단무의식이 이렇게 얘기했으면 좋겠다.


‘자폐인도 존중과 배려의 대상이다. 모든 다른 사람들처럼.’

‘발달장애인은 성장에 따라 학습과 사회성 발달 촉진을 지원받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적성과 능력에 따라 진로를 결정하고 지역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

‘자폐인은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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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집단무의식을 넘어, 의식 차원에서 매일 이것이 정상이라고 내게 주문을 건다. 사회가 변하기 전 내가 먼저 변해야 아이가 뿌리에서 양분을 흡수하며 성장하리라 믿는다. 저 멀리 집단무의식이라는 잠든 호수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들이 파문을 일으키기를 바라며!


용어 설명

1) 사람이나 사물이 시야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나 사물이 비교적 영원하며, 존재함을 자각하는 것이다.

2)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출판한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으로써, 현재 5판까지 개정되었다.

3) 신경세포를 활성화시키거나 자극하며 신경처리를 시작하게 하는 에너지.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 중력과 움직임에 대한 감각, 근육과 관절에 대한 감각 등으로 나뉜다.

4) 인류가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경험을 통해서 저장해 온 모든 잠재적 기억의 흔적으로 무의식 차원(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정신의 영역)에 존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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