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산 Oct 26. 2024

앨리스의 아슬아슬한 곡예

이설기 작가의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부제, 이 시대의 육아를 어렵고 복잡하게 꼬아버린 명령들.

이웃인 블로거의 포스팅으로 알게 된 이 책을 읽으며 ‘이거 혹시 내가 쓴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부분에 공감했다. 마음 한편에 몽글몽글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일상의 물음표들이 느낌표로 변하는 시원함을 맛보기도 했다.

그래, 의심스러웠지만 너무 익숙한 나머지 ‘원래 그런 것’으로 딱지를 붙이고 밀어두었던 것들. 좋은 현상이든 나쁜 현상이든 익숙해지면 편안하게 받아들이게 되며 결국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악영향마저도 간과하게 되어버린다. 사회적 분위기란 개인이 넘어서기엔 너무 큰 벽이니까.

 

자연주의를 강조하는 출산과 육아 이론이 비장애인 첫째 아이에게는 잘 들어맞았지만, 이른둥이로 태어나 발달 지연을 나타내는 둘째를 키울 때는 무용지물처럼 느껴졌다는 작가. 얼핏 인간의 타고난 본성 그대로를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교육 철학도 ‘돈과 시간’, ‘부모의 에너지’, ‘비장애로 태어난 아이’라는 여러 조건이 부합할 때 실현 가능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발달을 촉진하는 엄마가 돼라.’라는 명령과 ‘아이의 있는 그대로를 존중하라.’라는 상반된 명령 사이에서 수없이 교차하는 죄책감과 의무감, 압박감, 피로감 등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던 감정들. 그건 저자만의 감정은 아니었다. 발달이 느리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우는 부모(특히 엄마)들이 전 세계를 아울러 비슷하게 경험했던 감정의 흐름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고.


특수 교육 관련 전문가들은 뇌가 빠르게 변화하는 어린 시절에 집중적인 치료를 해야 발달 예후가 좋다고 했다. 단, 오해하지 말자. 그럴 가능성이 좀 더 높다는 것이지, 좋은 결과가 보장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 3세 이전에 집안의 돈을 싹 끌어모아 치료에 힘쓰면 결국 장애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나요?”

“글쎄요, 혹시 상위 1%가 당신이 될지 누가 알아요? 안 해보고 후회하지 말고 일단 해봐요! 치료 고!!”

뭐 이런 느낌이랄까?

교육 평등이 되려면 일반적인 아이들이 만 3세 이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가듯이, 장애 소견이 있는 아동에게 개인별로 필요한 교육의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어야 하지만 양질의 교육 기회를 누리기 어려운 현실이다. 아마 교육 기회의 부족으로 중증화된 발달장애인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어느 정도까지 발전 가능한지는 개인차가 있다 하더라도,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사람은 없다.


치료실 수업만으로 아이의 발달을 촉진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진즉 느꼈다. 언어치료 분야를 공부하는 데에 생각보다 큰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게 되었고, 한동안 이게 아이의 발달을 촉진하는 길인지, 방치하는 길인지 헷갈렸다. 그렇게 공부를 했어도 선생님과 똑같이 수업을 구조화해서 진행한다는 건 한계가 있었다. 학교(또는 치료실)와 집은 너무도 다른 공간이며, 선생님이 아닌 엄마이기에 긴장도가 다르고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치료실 흉내 내는 구조화된 수업을 지향하지 말자! 치료실에서 하기 힘든, 그러나 일상에서 가능한 자연스러운 맥락을 이용한 엄마표 수업을 하자!’ 이것이 나의 포부였다. 말은 쉬운데 이게 어디 보통 공을 들여서 될 일인가. 아이의 몸짓, 반응, 말이 나의 뇌신경 세포에 전해지는 순간 언어학적으로 분석되어야 하며, 그에 대한 적절한 촉진적 반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도 떠올라야만 가능하다. 그래도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이니 어느 정도 습관화되기는 했다.

어느 날 문득 ‘푯대를 보고 달리는 육아’에 “잠깐, 멈춰봐!”를 외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왜 나만 이런 엄청난 고급 육아를 제공해야 하는 거지?’

아이와 있는 시간에 긴장을 풀고 그 시간 자체를 즐길 수는 없는 걸까? 그건 사치일까? 세상이 정해놓은 궤도에 따라가지 못할 뿐이지, 잘 크고 있는 아이들인데 왜 늘 문제 해결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거지?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데, 온 마을 다 합쳐서 내가 하는 노력의 반의, 반만큼만 해주면 정말 좋겠다! 그럼 나도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할 수 있을지도?

뾰족하고 까끌까끌한 마음의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무조건 빨리, 많이, 집중적으로! 발달을 촉진하라!

‘발달’의 깃발을 향해 혼자만 전력 질주하듯 달렸다. 아빠는 여전히 텔레비전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다른 가족들은 치료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다. 물론 아빠는 돈을 벌고, 아이들과 야외로 놀러도 다니고, 다른 가족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힘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아이들을 키우는 집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반면 나는 많이 다른 양질의 돌봄 노동을 하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고 있었다.


가부장제 사회는 그동안 수많은 문제의 원인을 엄마에게서 찾아왔다. 과보호하는 엄마, 무관심한 엄마, 권위적인 엄마, 자녀와 친밀한 엄마… 서리는 아이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부풀려진 허상이라는 것을 안다. 아동의 변화를 목표로 하는 교육 현장일수록 엄마의 영향력이 부풀려지기 쉽다는 것도. 하지만 엄마에게 양육을 맡기고 나 몰라라 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이 허상이 실제가 되기도 한다는 것 또한 안다. 이 허상과 실제 사이에서 분열하는 서리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p58> 


발달은 치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여러 조건이 맞물려 아이는 성장했다. 전문가만 아이의 언어 발달을 자극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때로 무심코 흘러간 또래의 억양과 말을 재밌다는 듯이 따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전력 질주한 결과가 기대한 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때 뒤따르는 배신감, 공허감, 허탈감, 우울감… 이런 건 아이와 가족에게 도움이 안 된다.

아이들을 위해 언어치료를 공부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실제로 도움이 된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느낀 점도 많았고 새로운 동료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돌봄은 엄마만의 몫이 아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온 가족, 온 마을, 온 국가, 온 세계가 맞물려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70% 정도를 사용하는 육아를 하고 싶다. 내 노력의 십 분의 일, 백 분의 일, 천 분의 일이라도 좋으니 더 많은 이들이 각자의 몫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다. 그래야 그들도 커갈 테니까.


이 텔레비전 쇼에서 부모는 아이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전문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존재다. 왜 부모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제대로 부모 노릇을 할 수 있는 걸까? 왜 부모의 역할을 강조할수록 부모가 아니라 전문가가 전지전능해지는 걸까? 아이가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가 되어갈수록 부모보다 전문가의 영향력이 커지는 이 모순은 <금쪽같은 내 새끼>가 빠진, 그리고 내가 빠진 모순이었다. 과학적 지식으로 아이를 만들어가는 엄마 노릇에 허우적댈 때,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때 되면 다 해. ‘엄마, 아빠’만 말하거나 기저귀 차고 있는 어른은 없잖아.” 그러나 그들의 호의 섞인 말을 수긍할 수는 없었다. ‘엄마, 아빠’조차 말하지 못하는 어른, 평생 기저귀를 차는 어른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은 알지 못했으니까. 때 되면 다 한다고 무턱대고 믿을 수도 없지만, 아이와의 일상을 의식적인 교육 노동으로 채우는 일도 힘겨웠다. 놀이인 듯 놀이 아닌 놀이를 계획하는 일도, 이를 위해 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이는 일도, 과학적 이론을 동원해 홍보하는 육아용품을 골라내는 일도. 회의와 불안으로 마음이 부대낄 때면 다짐을 반복했다. ‘아이에게 다양한 발달 자극을 위해 노력하되, 아이와의 시간을 즐기자.’ 이 다짐은 마른 몸매에 풍만한 가슴 갖기, 완벽하게 아름답되 성형 티는 나지 않기, 열정적으로 사랑하되 집착하지 않기처럼 불가능에 가까웠다.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p49~50>


저자의 표현처럼 ‘아이에게 다양한 발달 자극을 위해 노력하되, 아이와의 시간을 즐기자.’라는 말은 내게도 여전히 아련한 꿈결에서 들리는 속삭임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두 가지를 함께 이루려 고군분투하기보다는,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파도처럼 들쑥날쑥하며 흘러가기를 소망해 본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개역개정 여호수아 1장 7절>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단지 중용의 길로 걸으라는 의미가 아닌, 진리가 아닌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율법은 ‘성령’이라는 신의 인격으로 사람과 함께하고 있으며 모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나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 포함되니, ‘발달’이냐 ‘존중’이냐가 아닌 내 안의 사랑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의 발달을 놓고 고민했던 저자의 시간은 과거 완료가 되었다. 부럽다. 그래도 괜찮다. 내 새끼도 잘 클 거니까! 발달의 어려움이 없더라도 엄마들은 여전히 복잡한 시대적 요구에 자유롭지 못하다. 선행 학습, 아이의 자존감, 인공 지능 시대 대비, 아이에게 올바른 사랑을 주기 위한 엄마의 어린 시절 상처 되돌아보기까지!

주 양육자와의 생애 초기 애착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어려운 절대적 경험으로 보는 이론도 있지만, 한 인간의 과거가 현재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라고 보는 이론들도 있다. 전문가들의 말은 그들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라 연구된 이론들을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이다. 각각의 이론은 우리에게 귀한 통찰을 선물하기도 하나 한계점도 있음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부모의 역할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아동에게 미치는 부모의 절대적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은 모든 문제의 책임을 부모에게 쉽게 귀결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아이를 함께 키울 수 있는 사회 공동체의 역량을 키워나갔으면 한다. 그러한 논의가 곳곳에서 활발하게 이뤄지기를!


이 책을 포스팅한 블로거의 동생분은 최중증 발달장애인이다. 성인이 된 후 가정 돌봄 10여 년 만에 최중증 발달장애인 사회적 돌봄 서비스의 대상자로 선정되어 기관에서 잘 적응하고 있다는 소식을 올렸다. 거봐! 할 수 있잖아! 중증이라서 안 되는 게 아니라 적합한 교육 환경을 만나지 못해서 못 한 거잖아! 부디 그들을 돌보는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가 그들이 하는 일에 합당한, 합리적인 처우이길 바란다.


울림은 누구보다 열심히 엄마 역할을 했던 사람이지만, 지금은 엄마를 향한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실현 불가능한지 안다. 발도르프 교육으로 대표되는 자연주의 육아와 재활치료로 대표되는 과학적 육아 모두 ‘아이는 만들어질 수 있는 존재’라는 명령과 엄마 역할의 강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안다. 장애 극복 서사와 장애 인정 서사, ‘왜 치료에 더 힘쓰지 않냐’는 사람들과 ‘왜 치료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냐’는 사람들 사이에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몸이 되었다. 울림은 두 세계가 교차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서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사랑이라는 펜으로. <엄마라는 이상한 세계, p9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