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제법 쏟아지던 날이었다. ‘찬’을 데리고 병원에서 종합 심리검사를 받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아이에게 청각뿐 아니라 발달적 어려움이 동반되어 있을 거라는 심증은 있었지만, 구태여 서류로 확인받고 싶지 않았기에 미뤄온 검사였다. 그러나 장애 재판정 시기가 도래하면서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되는 장애 등급을 받아두는 것이 좋다는 최종 판단에 따라, 용기를 내어 추적거리는 빗길을 뚫고 발을 내디뎠다.
없던 용기를 냈다고 꼭 좋은 결과가 뒤따르지는 않는다. 병원에서 받은 검사 결과지는 불쏘시개처럼 마음에 켜켜이 쌓여있던 슬픔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였다. 표준화 검사 결과는 현재 수행 능력의 참고 수치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익히 알고 있음에도, 내 안에 남아있던 마지막 하나의 의지조차 바싹 말라버리는 기분이었다. 검사지 맨 뒷면에는 권고 사항이 있다. 검사의 목적은 증상의 진단만이 아니다. 진단을 통해 검사 대상자의 어려움에 대한 환경적 지원을 해주기 위함이다. 첫 아이를 키우며, 받을 수 있는 지원의 무게는 그리 묵직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한 지원마저 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이 일궈낸 열매였다. 지원이 아니라 피, 땀, 눈물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검사 결과지의 이런저런 문장들은 내 머릿속에서 짧게 요약되었다.
‘네가 무슨 노력을 하건, 어떤 발버둥을 치건, 네 아이가 남다른 의지로 살아냈건, 뭐든 결국엔 이렇게 결과로 평가돼. 다 소용없는 짓이야. 앞으로도 뭐 해주는 건 없을 거야.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보다 더한 의지와 집념으로 살아왔다고 해도, 살아간다고 해도 다 소용없는 일이라는 거 알겠지? 보상 없는 노력만 있을 뿐이야.’
두 아이의 육아에 오롯이 전념했던 짧지 않은 시간. 그 시간에 담긴 열정, 의지, 동기, 노력, 수고, 바람, 소망, 승리, 사랑…모든 가치가 깡그리 몇백 분의 일 정도로 평가 절하되며 하얀 서류 속에 갇혀버렸다. 형형색색 나와 아이들이 그려낸 삶의 흔적들은 단조로운 먹색 글씨 안으로 숨어들고 말았다. 입을 꾹 다문 채 무표정한 종이의 사각 프레임은 마치 나와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프레임과도 같아 보였다.
‘고작 이런 걸 받으려고 아이와 그 세찬 빗속을 걸어갔던가….’
허무했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는 어떻게든 몸이 움직여졌지만, 아이들이 등교한 후에는 손가락 까딱할 기운도 남아있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를 아이들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거의 모든 일을 미루고 미동도 없이 누워 지냈다. 실은 지금까지 서류화되지 않았을 뿐, 이미 겪어내며 살고 있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애 재판정’이라는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서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다른 의미를 덧붙이지 못했고, 그러한 서류상 한계점이 내게 특별한 감정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살면서 불쑥불쑥 마주칠 무표정한 사각 프레임이 두려워, 나는 아이들과 그리도 씨름했는지 모른다. 언제라도 꾹 다문 입을 열어 가차 없는 비난의 말을 쏟아부을 정체불명의 각진 얼굴은 퍼즐 판처럼 내 안에 존재했다. 만나는 사람의 얼굴이 판에 딱 맞는 퍼즐 조각이 될지 모른다는 불안, 불안이 현실이 될 때 이어질 확신. 각을 조금이라도 쳐내기 위해 나는 매일 씨름하고 고민했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퇴원할 즈음 알게 된 찬의 난청. 돌도 되기 전에 보청기 착용을 시작했으나 제대로 착용하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렸다. 끼워준 보청기를 빼서 어디론가 던져놓거나 입에 넣고 빠는 등, 보청기 수난 시대였다. 첫째의 발달 지연에 이어 둘째까지 늦는 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언어 발달 지연은 곧 인지, 사회성 발달의 지연으로 이어진다.
아이의 보청기 착용이 쉽게 정착되지 못하니 나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보청기라 불리는 그 작고 흉물스러운 기계를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손톱 끝까지 느껴지곤 했다. 분노 게이지 조절 버튼이 빠져버린 마냥 이성을 잃고 소리치는 엄마와 눈을 깜빡거리며 불안함을 표현하는 작은 아기.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숨 잘 쉬고, 잘 먹기만을 바라며 애틋한 눈길로 지켜봤던 아기였건만 난 살아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너무 어려 검사 방식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의 정확한 청력 수치를 알게 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렸다. 시간이 흐르며 검사 결과가 안정되고 보청기 착용도 일상이 되었다.
생각보다 난청이 심한 정도는 아니라는 희소식도 잠시, 듣기만의 문제라기엔 아리송한 찬의 발달 추이에 매일 최고난도 문제들로 구성된 수학 시험지를 붙들고 씨름하는 마음이었다. 대체 어떤 치료를 얼마나 더 해야만 이 문제들이 깔끔하게 해결되는 것일까?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어린 한 생명이 내 손에서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흐뭇함이야말로 부모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일진대, 끝없는 투자와 노력에도 삐걱대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 모습에 어느 순간 쉼 없이 걷던 걸음의 속도는 느려지기도 했고 주춤거리기도 했다.
무엇이 답일까? 어떤 길이 바른 선택일까? 무엇을 얼마나 더해야 할지 정답을 안다고 해도,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나와 내 주위 사람들이 모두 힘을 합친다 한들 할 수 있을까? 나는 지쳐가고 있었다. ‘문제의 해결’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 시험은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고, 나는 시험을 포기해야만 했다. 배운 적 없고, 답을 구할 수 없는 수학 시험지를 언제까지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일주일에 몇 시간 치료로는 턱없이 부족했기에 발달의 많은 영역에서 직접 신경 써서 가르쳐야 하는 세세한 부분들이 너무 많았다. 평균적인 발달을 자연스럽게 하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하는 역할이 아이가 징검다리를 하나씩 건널 수 있도록 조심스레 손을 내밀어 잡아주는 것이라면, 내 아이들은 돌과 돌 사이의 거리를 밀리미터 단위로 계산해 중간 디딤돌을 필요한 만큼 더 놓아주어야 했다. 손을 잡아당기는 속도와 힘의 강도까지 아이가 내딛는 발의 넓이에 맞추어 미세하게 조절하는 기술이 요구되었다. 주 양육자 혼자 애쓴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매일 흘러오는 일상의 잡다한 의무들이 나만 피해 가서 징검다리와 아이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신비한 동화 같은 세상은 펼쳐지지 않는다.
세상엔 같이 징검다리를 봐주고, 아이의 걸음을 봐주는 사람보다 해주는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한 걸음 떼면 두 걸음 세 걸음 못 떼는 걸 탓할 사람들만 천지였다. 적어도 그 시절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찬의 마지막(현재까지는) 검사 결과지를 마주했던 경험은, 내 안의 흐릿했던 얼굴과 정면으로 맞닥뜨린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 얼굴은 현실에서 마주하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내 안에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퍼즐 판에 조각이 맞춰지며 비로소 퍼즐 판의 존재를 깨달았을 뿐이다. 슬픔이 밀려왔다. 아니, 슬픔과 슬픔이 합쳐진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가 덮쳤다. 이걸 슬픔이라고만 표현할 수 있을까?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채 누워서 봤던 드라마 ‘나쁜 엄마’에도 슬퍼하는 엄마가 있었다. 남편이 불의한 세력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 당한 후,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아 아들을 검사로 키워냈다. ‘검사’라는 목표만을 좇는 동안 엄마와 아들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졌다. 이제 아들이 엄마의 마음을 외면했고, 스스로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찾아가 복수를 꿈꿨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인지 기능의 저하가 오게 된다.
엄마는 초등학생처럼 변한 아들을 돌보며 눈물 흘린다. 어릴 적 상처로 밥을 거부하는 아들을 보며, 이제 검사가 아니라 밥 한술 제대로 먹이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고 지난날의 자신을 후회하며 통곡한다. 그녀는 불의의 프레임을 가슴 깊이 새긴 채 아들을 독하게 몰아붙이는 방식으로 프레임에 맞섰다. ‘약자를 알아보고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나쁜 세력들’이라는 퍼즐 조각들이 다가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더 나쁜 엄마가 되어야 했다.
불의를 의식하고 제거하려고 할 때 엄마도 아들도 망가졌다. 사랑하고 싶은 존재를 바라볼 시간을 빼앗겼으며 함께 슬퍼하고, 웃고, 껴안을 순간을 놓쳤다. 나쁜 엄마의 눈물은 산산이 조각나버린 유리성의 잔해였다. 난 사랑하는 이를 위해 점령해야만 했던 유리성의 조각들을 끌어안고 그녀와 함께 울었다. 뇌는 위험을 감지하면 편도체가 활성화되며 싸우거나 도망가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녀와 나는 보석 같은 아이를 위험에서 지키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싸워온 엄마들이었다.
장애 자체보다도 장애를 수용하는 방식이 지극히 서툴고 느리게 발전하는 세상의 프레임이 나는 더 무거웠다. 나도 모르게 퍼즐 판처럼 깊이 새겨진 사회의 기준들이 나와 아이들을 몰아붙였다. 짧은 시간에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일궈낸 나라. 우후죽순 세워진 빌딩 숲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부작용도 함께 커졌다. 약한 것들을 외면하고 쳐내고, 쳐내면서 자신 역시 약해져 버려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라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아무리 몸부림쳐도 인간은 언젠가는 약해져 죽고 만다. 우린 모두 인생의 어느 시점에 어떤 형태로든 장애의 시기를 겪는다.
나쁜 엄마의 아들은 결국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고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기적처럼 인지 기능도 회복되었다. 엄마는 병들어 죽었지만 아이는 지켜졌다. 동화 같은 드라마였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동화가 아닐 것이다.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결국 너와 나는 사랑하고 행복할 것이고, 완전한 그 순간은 매일 하루만큼 더 가까워지고 있으리라. 드라마의 그녀는 죽었지만 나는 아직 살아있다. 세상이 짜 놓은 퍼즐이 아닌, 새로운 퍼즐 판을 내 마음 가운데 놓아보려 한다. 아마도, 이 판도 오래전부터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 언젠가 딱 맞는 조각 하나가 놓이게 되면 더 선명하게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그녀 대신 살아서 익숙한 삶을 다른 표정으로 마주했다. 싸우지도, 도망치지도 않으며 그저 걷는다. 남김없이 타버린 슬픔인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의 재를 고이 쓸어 담는다. 비가 오고 물은 다시 고인다. 불길에 말라버린 줄 알았던 모든 것들이 아직 거기 있었다. 슬픔의 재도 여전히 물에 떠 있다. 사랑은 맑은 생수가 아니라 재를 띄운 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