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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전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by 해산

‘내가 괴물을 낳으면 어떡하지?’

출산 전 여자는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기형아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병원의 산전 검사 단계를 경험하며 내가 느낀 건, 갖가지 산전 검사야말로 그런 공포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태아 목덜미 투명대 검사, 기형아검사, 양수검사, 정밀 초음파 검사…, 모두 뱃속 태아의 이상 여부를 살펴보기 위한 검사들이다.


임신과 출산은 여자의 인생에 큰 획을 긋는 일이라 할 만하다. 나 아닌 누군가의 생명이 시작되고 자라나 세상에 나오는 과정은 경이롭다. 초음파 영상을 보면서, 심장 소리를 들으며, 태명을 짓고 출산 준비물을 마련하며 여자는 새 생명을 맞을 준비를 해나간다. 점만 한 크기의 아이에게도 콩콩 뛰는 심장이 있고 제 기능을 하고 있음에 대견스러워지기도 한다. 기대와 설렘을 한편에 두고, 혈액 검사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산전 검사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랬다. ‘이거 꼭 해야 하나? 왜 하는 거지?’ 이런 의문을 던지지 못했다. 그냥 으레 거치는 산모의 절차려니 여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본다. ‘아니,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딨어?’ 맞다. 세상에 ‘원래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주기마다 내 뱃속의 태아가 정상인지, 기형아인지 확인하는 일은 과연 꼭 필요한가? 누군가는 말하겠지. 그러다 기형아가 태어나면 어떻게 하냐고. “괴물이 태어나면 당신이 책임질 겁니까?” 책임 못 진다고 하면 뱁새눈을 만들며 흘겨볼 테지?


찬을 임신했을 때 기형아검사에서 염색체 이상 확률의 수치가 높게 나왔었다. 당시 의사는 정확한 확인을 위해 양수검사를 하자고 권했다. 혹시 태아에게 위험하지 않은지 우려하자 0.1~0.2% 정도의 확률로 나쁜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거의 없는 일이라며 안심시켰다. 검사를 해서 염색체 이상이 확인되면 어떻게 하냐고 물었다. 대부분 낙태를 한다고 했다. 본인이 의사 생활을 하는 동안 그냥 낳는 산모는 딱 한 명 봤단다.




산전 검사에서 ‘이상 없습니다.’라는 말만 들으면 좋겠지만, 아닌 경우가 분명히 있다. 그러면 다른 방도는 없다. 태아를 향한 대견함, 기대, 설렘 같은 감정은 잠시 접어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계속 살게 할 것인가, 죽일 것인가.’ 순식간에 여자는, 부모는 손가락보다 작은 생명을 놓고 가늠하는 절대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 얼마나 잔혹한 현실인지.

나에게는 죽인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내가 기형아를 낳게 된다면 그 또한 운명이라 생각했다. 그 아이를 받아들이고 키울 수 있는 능력을 신이 줄 수 있어 그런 운명도 허락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마음이 꺼림칙했다.

‘의사의 말대로 위험성이 거의 없는 검사라면 해보는 게 낫겠지?’ 임신 기간 내내 불안한 마음으로 있고 싶지 않았다. 양수검사를 해서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라고 결론이 나면 마음이 개운할 것 같았다.


양수검사는 간단했다. 자궁 안에 소독된 바늘을 살짝 찔러 넣어 양수를 채취하는 작업.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검사 후 두 시간 정도 안정을 취하며 누워있으라고 했는데 평일이라 남편이 바빠서 한 시간가량 누워있다가 집에 왔다. 집에 돌아와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한 뒤 컴퓨터 앞에 앉았다. 갑자기 아래에서 물이 쏟아지는 느낌이 전해졌다. 양수가 샌 것이다. 몸을 움직이면 계속 흘러나와 꼿꼿이 누운 자세로 남편, 119, 교회 사모님 순으로 전화를 돌렸다. 사모님께 전화를 드린 건 이 위급 상황에서 훈을 잠시 봐줄 사람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시는 사모님께 훈을 맡기고, 친정 부모님께 인계할 생각이었다.


그날부터 몸을 살짝 뒤척이는 것마저 조심스러운 하루하루가 흘렀다. “이런 일은 거의 없는 일인데….” 양수검사를 진행했던 의사는 난처한 기색이었다. 대학 병원으로 전원한 후 2주가량 누워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한 끝에 다행스럽게도 양수가 저절로 막혔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나는 양수검사를 하지 않을 것이다. 0.1%의 확률도 내가 해당하면 100%의 일이 된다. 검사의 위험성에 대한 고지가 사전에 충분히 이뤄졌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요란했던 양수검사 결과 염색체 이상은 없었다. 만약 염색체 이상으로 나왔더라면? 난 그 의사가 살면서 한 명 봤다는 산모의 수를 두 명으로 바꿀 수 있었을까? 장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상당한 괴로움에 시달렸을 건 분명하다.

신경다양성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인터넷에 익명으로 남기는 글이나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출산 전 알았더라면 낳지 않았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과학이 발달해 ADHD, 지적 장애, 자폐 스펙트럼, 학습 장애 등이 나타날 것을 산전 검사로 예측할 수 있다면? 글쎄, 역시 장담할 수는 없으나 생명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뱃속에서 고칠 방법은 없다. 결정할 수 있는 건 죽이느냐, 살리느냐 뿐.


‘괴물은 낳고 싶지 않아.’

그토록 다양한 산전 검사를 발전시킨 우리의 본능적 두려움. 누구도 괴물이 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데 힘을 기울일 수는 없나? 내가 훈과 찬의 발달적 어려움을 미리 알 수 있었다면 낳지 않았을까? 육아에 몇 배로 정성이 들고 신경이 쓰이기는 해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아이들이다. 슬픔만 주는 것이 아니라 기쁨도 몇 배다.

어떤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엄마의 인생이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면, 가정 경제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면, 국가가 생애 주기마다 합리적인 지원을 할 수 있다면, 따가운 무지의 시선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임신 기간은 태어날 아이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오롯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적어도 덜 두려울 수는 있을 게다. 어렵게 태어났기에 어렵게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기를 바란다.


결혼과 더불어 출산은 인생 최대의 모험이다. 어떤 아이가 내게 올지 모르고, 무력한 작은 존재가 엄마를 보러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엄마는 아기에게 온 마음을 뺏겨 자신을 잊게 된다.

아이의 탄생은 폭풍과도 같다. 폭풍 전야인 임신 기간이, 고요한 일상의 평화를 누리며 어떤 아이라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할 마음의 준비를 하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몇백억 분의 일 확률로 태어난 우리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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