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선택할 용기
우리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모든 감정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를 온전히 품고, 이해하고, 그의 안녕과 성장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하는 걸까? 사실은 나 자신도 온전히 다 알고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 역시 다 알고 사랑하지는 않는다. 극히 일부, 또는 어느 정도 알 뿐이고, 우리가 아는 만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자신, 가족, 연인처럼 꽤 많이 알고 사랑하기도 하고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하기도 한다(이를테면 다른 나라의 모르는 아동을 후원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기 때문에 상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박애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알아간다는 것은 애정의 조건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미움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애정, 미움과 같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 애정의 양에 대한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대부분은 애정과 미움이 적당히 뒤섞인 형태가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흑백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때가 더 많기에.
부모의 사랑처럼 미움이라고는 0.1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애정만 가득할 것 같은 관계도,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다. 단 한순간도 미워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애정이 기본이지만, 비록 순간적인 감정일지라도 미울 때가 있다.
사랑이란 변화무쌍한 우리의 감정만을 일컫는다기보다는, 의지를 포함하는 단어라 생각된다.
비록 감정이 사랑과는 거리가 먼 종류의 것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온전히 품어내고, 이해하고, 그의 안녕과 성장을 위해 기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면 그건 사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선택. 적극적인 의지와 태도를 반영하는 단어, 사랑.
여기서 '왜 나의 감정과 상관없이 그런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이 질문에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야.'라고 답할 수 있겠다. 나에겐 신의 사랑이다. 그분의 감정과 무관하게 늘 성실하게 나를 지켜보시며, 믿고 기다려주시며, 자유하게 하는 그의 인격. 결국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시는 분. 내 안에 계신 그의 인격에 조용히 머무르는 행복. 그분이 베푸신 선물인 많은 사람들과 조건들에 그분처럼 잠잠히 바라보고, 기다리는 태도를 가질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신다.
자식의 장애란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그것이 중하든, 중하지 않든 처음에는 마음의 짐이 된다.
내가 져야 하는 부모로서의 책임이 보통 사람들의 몇 배 이상 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사, 육아, 워킹맘…이런 일반적인 엄마 세계의 화두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들 말로 들리고, 내 세계에서는 후순위의 화두가 되었다. 장애, 재활, 생애 주기별 지원…이런 것들이 훨씬 우선순위의 단어였다.
장애를 보는 관점을 두고 컵에 담긴 절반의 물을 볼 것인가, 비어 있는 절반을 볼 것인가의 차이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데, 비어 있는 절반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게 너무 커 보여서, 나머지 절반의 물을 볼 여유가 없었다.
'형 때문에도 지치는데 왜 너까지 이런 거야!'
710g의 이른둥이로 태어나 생사의 고비를 넘길 때까지 '그저 살아만 다오. 숨 잘 쉬고 잘 먹기만 해라.'의 마음으로 애틋하게 바라봤던 둘째가 언젠가부터 추가된 짐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말'의 /ㅁ/만 들어도 현기증이 날만큼 지긋지긋하게 둘 다 말이 느렸고 심혈의 노력을 기울여야 겨우 한 두 번 의사소통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되던 날들. 그런데 지금 내가 언어치료사가 되어있으니 참으로 인생은 요지경이다.
거의 10년은 아이들이 사랑스러우면서도 화가 나고 미울 때도 많이 있었던 것 같다.
난 화나고 미워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차라리 그 감정을 잘 끌어안고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상담을 공부했으니, 자기 분석도 해보고 책도 읽어보고, 상담도 받아보았다.
화가 좀 가라앉는 날에는 하나님께 편지도 썼다. 결혼 전부터 해오던 그 분과의 소통 방법 중 하나다. 하나님의 좋은 점 중 하나가 나의 말에 바로 대답을 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분의 답장은 늘 내 심장으로 직진해서 감정을 폭발시켰다. 처음에는 눈물이 나고,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면 골 때리는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내년에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우선으로 하면 좋을까요?"라고 했을 때 "너 그냥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하시면 처음에는 눈물 폭발인데, 시간이 지나니 '대체 내가 하고 싶은 게 뭐야!! 그게 뭐냐고!!!!!!!!!!' 뭐 이런 고민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그런 식이다.
그분의 대답은 1년 동안 나의 순간순간에 집중하고, 들여다보고, 스며들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더 이상 아이들을 위한 그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느낌, 내가 원하는 것을 사소한 것, 작은 일에서부터 찾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존재 그 자체'로 내게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언젠가부터 화도 나지 않고, 미운 마음도 거의 흐려졌다.
2024년 역시 이렇게 '나'의 존재를 더 알아감과 동시에, 내 아이들(복지관에서 만나는 아이들까지)을 조금씩 더 알아가며 컵의 빈 곳뿐 아니라 차 있는 물을 발견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4년이 다가올 무렵 썼던 글이다.
지금 난 차 있는 물을 발견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