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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산 Jul 31. 2024

키다리도 난쟁이도 위에서 보면 거기서 거기다.

장애와 비장애 사이의 좁은 길

20년간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에게서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오랜 세월 알고 지낸다지만 사실 접점은 별로 없었다. 성별도 다르고 학교나 직업, 취미, 관심사 그 어떤 것도 연결고리가 될 만한 건 딱히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그 친구가 가끔 나에게 전화를 걸었고, 난 문득 격려를 보내고 싶을 때 짧은 메시지 정도를 남기는 게 다인 사이다.


그는 늦은 시간에 전화한 것이 신경 쓰인다면서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 오랫동안 방송 쪽 일을 해온 친구인데, 얼마 전부터 프리랜서가 되면서 수입이 적어져 건설 노동 일을 병행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건설 노동 관계자가 일을 잘한다고 칭찬하며 제안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수락하려면 방송일은 그만두어야 할 것 같아서 고민된다고 했다. 그런 고민을 애 둘 키우는 아줌마 친구에게 전화해서 토로하는 그의 목소리 끝에 마른 바람이 스쳤다. 나라고 딱히 해 줄 말이 있을까? 자세한 정황도 모르니 그저 건설 노동 일이 주는 보상이 확연히 차이가 나지 않는 이상 오래 해왔던 일을 놓는 것은 우려스럽다는 정도의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말더듬이 있다. 어릴 때 웅변 학원에 다녀본 것이 다라고 했다. 가는 곳마다 말을 왜 그렇게 하냐는 소리를 들으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잘 웃고 때로 나이에 비해 천진난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십수 년 전쯤, 결혼하려고 했던 여자 친구에게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반대하신다고 하며 전화한 적이 있었다. 엄마와 인연을 끊고 싶다고 길길이 화를 내며 어머니에 대한 온갖 험담을 늘어놓았었다. 마치 사춘기 남학생 같았다. 단호하게 네가 애냐고 말하며 그런 소리 할 거면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겸연쩍은 듯 친구가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미안한 생각이 든다.”

    

조금 독특하고 느린 아이들을 키우며, 이전에 몰랐던 뇌 신경 발달장애 세계를 공부하고 나니 이해되지 않았던 그 친구의 어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말더듬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린 친구였을 수 있겠구나.’

     

지금도 발달장애인에 대한 통합 교육이나 전 생애 주기별 지원, 사회적 인식은 과도기 수준이라고 보인다. 현재가 근대 사회라면 내가 어릴 적에는 중세였을 것이다. 처해 있는 상황에 따라 아직도 중세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다. 특히 경계나 경도의 지적 장애, 일상생활 기능이 좋은 자폐성 장애, 그리고 최중증 발달장애인들에게 사회적 인식 개선과 체계적인 전 생애 지원이 절실하다. 최중증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로 피부에 와닿을 만큼 하루하루가 절박하다. 경계나 경도의 발달장애인들은 말 그대로 장애와 비장애 사이에서 어느 곳도 설 자리가 없는 소외를 경험하곤 한다. 장애인으로 여겨지기도 어렵고, 비장애인들에게는 무시를 당하거나 무수한 오해를 받는다.


중세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가 살아오면서 느꼈을 고립감, 무수히 받았을 오해, 오롯이 혼자 겪어내야만 했을 시간을 미루어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그의 다른 고민에 대해 조언을 건넸다. 자살 생각이 문득문득 든다는 그에게 다시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보기를 권했다. “내가 안 해본 게 아니야. 다 해봤는데, 안 돼.” 담담히 말하는 그 목소리 너머로 옛 풍경이 떠올랐다. 그래, 이 친구와 인연을 맺게 된 곳이 한 기독교 미혼 청년들의 모임이었지. 한때는 교회도 다녔었고. 어쩌면 내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을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비수처럼 꽂힌다는 그에게 “너도 그냥 무시해. 그건 그냥 그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야.”라고 했지만, 나도 알고 있다. 무시도 한 편에는 받은 인정과 사랑이 있어야 할 수 있다는 걸. 내면에 쌓인 공들이 있어야 들어오는 가시도 튕겨 나갈 수 있음을. 교회에 긴 시간 다녔어도 하나님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그에게 ‘네가 진짜 원하면 반드시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말도 해주고 참 고맙다.”

나직이 전하는 친구의 진심에 온기가 느껴졌다. 더디고 어눌한 사람들도 다 안다. 내가 받아들여지고 있는지, 아닌지. 다수의 사람이 당연하게 누리는 일상이 조금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당연하게 된다는 것이 왜 그렇게도 어려운지. 그들의 특성에 맞는 지원을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사회로 한 걸음씩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가진 경제력에 따라 꼭 필요한 교육과 지원의 질이 크게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 이상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를 누리며 마음의 공을 차곡차곡 쌓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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