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이유?
지호(가명)는 큰 눈망울이 인상적인 초등학생 남자아이다. 폭신폭신한 촉감을 좋아해 수업이 끝나도 대기실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떠나기를 주저한다.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불쾌감을 표현하는 방법이 공격적이라, 어머니가 늘 노심초사하며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해보고 있었다. 나 또한 불편한 감정을 가라앉힐 수 있는 대체 행동을 제시하거나 단호한 표정과 말투로 행동의 심각성을 알려주는 등 여러 방법을 총동원하고 있다.
수업 중 지호의 손톱에 한두 번 긁히기도 했다. 약간의 불편한 감정이라도 올라오면 순식간에 할퀴어서 되도록 손을 가까이 가지 않고, 할퀴려고 팔을 내밀면 즉시 “화났구나. 긁으면 안 돼.”라고 낮은 ‘도’ 톤의 저음과 단호한 표정으로 대응한다. 한 번은 자꾸만 들썩거리는 팔을 주체하지 못하는 지호의 양손에 좋아하는 작은 블록을 쥐여준 후 주먹을 꼭 쥐고 있도록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을 쓸 수 없자 나를 바라보며 울음소리만 계속 내었다. “화가 나. 그래도 긁으면 안 돼.” 고비를 잘 넘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히 퍼즐을 맞추고, 과제를 수행한다. 지호는 몇 번의 고비를 더 넘어야 할까?
오늘도 한 번의 고비가 있었다. 다행히 잘 넘겼다. 폭발적인 과제 수행력을 보인 지호는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일어나 서성거리기 시작한다. ‘춤춰.’라는 표현이 낯선 듯 발음의 오류를 보였던 지호에게 몸으로 의미를 알려주고 싶었다. “지호야, 춤춰!” 혼자 신이 난 척 ‘덩실덩실’ 의태어를 뱉으며 춤이 아닌 몸동작을 하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지호가 나를 빤히 주시하며 가까이 다가왔다. 그 큰 눈망울에 평소와 다른 촉촉함이 느껴졌다. 눈물이 고인 건 아니었지만 편지 몇 장은 족히 될 듯한 말들이 담겨 있었다. 나를 양팔로 안더니 많은 서사와 감정이 담긴 촉촉한 눈으로 올려다보다가 이내 내 가슴에 볼을 대고 안겼다. 어쩐지 낯익은 온도와 폭신함… 아기를 달래듯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둘째 찬을 캥거루 케어*하던 때가 스쳤다. 캥거루 케어가 가능해진 뒤 매일 병원을 찾지 못함이 어찌나 미안하던지. 훈도 있기에 내 에너지를 온통 다 쏟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이틀에 한 번 가면서 안 가는 날은 찬이 기다릴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묵직해지곤 했었다.
찬의 작은 몸이 내 가슴과 배에 맞닿는 느낌은 신비롭고 묘했다. 서로의 살아있음이 더 강렬하게 경험되는 순간이랄까.
‘그래, 얘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야지.’
어느 날 갑자기 익숙하던 뱃속에서 꺼내져 이해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어야 했을 찬. 누군가의 따스한 체온과 부드러운 살의 촉감으로 사랑을 배울 터였다. 찬이 퇴원할 무렵 한 간호사가 나에게 숨겨진 비밀을 말해주었다. “얘는 자꾸 울어서 간호사들이 돌아가면서 많이 안아줬어요.” 알고 보니 ‘여자들 손 좀 타본 남자’였던 것이다. 첫 아이 아닌 둘째 엄마였던 나는 엄마 껌딱지의 탄생을 직감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능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 혹은 ‘낙(樂)’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찾는다. 내 힘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그것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도, 우울도, 불안도 내가 대신 친구 해주겠다고 슬쩍 다가오지 않는가? 찬도, 지호도 자신만의 방법으로 힘든 여건 속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건 당연했다.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주변의 일들 속에서 부대끼며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몸으로, 눈빛으로, 울음으로 표현하는 아이들. 나는 지호의 눈에 담겨 있을 말을 상상해 보았다.
아마 훨씬 더 긴 이야기가 담겨 있었을 거다.
어머니한테 지호의 행동을 말씀드렸더니 한때 지호의 신체적 에너지 수준이 너무 높아 새벽까지 잠을 안 자서 모든 수업을 체육 활동 중심으로 하셨다고 한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는 여자 선생님들이 상냥하게 말도 걸어주고 치료실에서도 여자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학교에 입학한 후로 남자 담임 선생님에 치료실 수업도 대부분 남자 선생님들이 담당했단다. 지호는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사람과의 교류가 그리워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리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편은 못 되지만, 끊임없이 아이들의 행동 동기에 대해 관찰하고 이해한 후 반응하려고 노력하다 보니 지호 입장에서 그렇게 느껴졌을까? 대한민국의 어떤 초등학생이 그렇게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살포시 안아줄 수 있을까. 답습되는 틀 속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현장에서 이런 아이들의 매력이 발견될 기회는 영 없는 것인지…여전한 안타까움이 맴돈다.
예전에 마주했던 한 상담자의 말이 생각난다. 발달장애 아이들에게 제일 중요한 교육은 주위에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 했었다. 그분은 나의 해묵은 상처에 대해서는 새로운 해석으로 통찰을 촉진해 주었지만, 발달장애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는 분이었다. 요즘은 장애가 있다 하면 누구든지 도와주려고 하는 분위기라며 아이 걱정에 일 시작하기를 망설이는 엄마의 심정을 공감하기 어려워했다. 어디든지 맡기면 되고, 또래 자녀를 둔 동네 아줌마에게도 몇 시간 정도 거리낌 없이 맡길 수 있는 상황이 당연한 것만은 아님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시간을 되돌린다면 그분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주위에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어요. 지금 잘 나가는 사람도 살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될 수 있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는 낙이 있어야 하고, 사랑하고 행복해지려 노력해요. 을의 위치에서 도움을 받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권리를 눈치 안 보고 동등하게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발달장애인의 문제 행동을 다수의 관점에서 ‘민폐’라고 한 단어로 해석하는 건 엄청난 단순화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르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에요.”
오래전 미술학원에서 일할 때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뇌 병변과 지적 장애를 동반했던 것으로 생각되는, 6학년 남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오면 다른 아이들의 물건을 마음대로 건드리거나 불편을 주는 행동으로 종종 소란이 일었다. 그림은 그냥 내가 그렸다. 낙서 끄적이는 수준 이상의 그림을 그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는 왜 이 미술학원에 보내는 건지 조금 궁금했었다.
‘이 아이의 특성에 맞게 더 잘 가르쳐줄 수 있는 곳이 있을 텐데, 거기 가면 더 잘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 아이는 학원에 오면 같은 학년 여자아이에게 관심이 많았다. 해맑은 웃음이 참 예쁜, 하얀 피부의 소녀였고 나이에 비해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소년은 소녀에게 괜히 다가가서 말도 걸고 따라다니기도 했다. 소녀는 귀찮은 듯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편이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마도 그런 낙을 느끼라고 학원에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낙서든 명화든, 그림이 핵심이 아니라 관계 경험이 핵심이었다.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말도 걸어보고, 다가가 보기도 하고, 그러다 서툰 시도에 퉁명스레 돌아오는 또래 반응도 겪어보라고….
살아야 할 이유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삶의 원동력을 찾으려는 마음은 모두 같다. 때로는 서툰 표현 방식으로 불편을 주기도 하지만, 말 대신 온몸과 표정을 다해 진심을 전하는 아이들이 부디 건강한 어른으로 잘 성장하길 바란다.
나도 나의 낙을 찾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용어 설명
*캥거루 케어(Kangaroo mother care)란,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난 이른둥이를 부모의 앞가슴에 수직 위치로 안고 일정 시간 동안 피부를 맞대고 있는 것을 말한다. 그 모습이 마치 주머니 안에서 아이를 키우는 호주의 캥거루 육아법과 비슷하다고 하여 캥거루 케어라고 이름 붙여졌다.
[출처] : https://www.hidoc.co.kr/healthstory/news/C0000631326 | 하이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