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길 걷는 여자

10년차 직장인의 퇴사 이야기, 그 시작!

by 수련화

한 회사에서 꼬박 10년을 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9년 8개월...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고, 내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나온 10년의 시간 동안 그렇다고 믿었던 시간들이었다.

어느 이른 가을의 출근길,

지하철 역에 내려서 열심히 바닥만 보고 걸어가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쳐다보았다.

마치 좀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모두들 한 곳으로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출근길 설렘이 가득한 발걸음은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의욕 없는 무표정은 기본, 터덜거리는 뒷모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 광경을 내가 처음 보았던가? 10년 동안 지겹도록 보아왔던 매일 아침의 여느 출.근.길.

분명 낯선 풍경이 아니었으나 왠지 그 날은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10년 차의 퇴사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하룻밤 자고 돌아서면 20년, 30년 다닌 회사에서 자리가 사라지고, 열의를 다해하고 있던 일이 없어지는 요즘. 그 안에서 누구는 하루라도 더 버티려고 사내정치에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또 다른 누구는 사랑하는 아이의 학자금을 위해 험한 꼴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돈 받아가는 게 현명하다고 하는 요즘 세상에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험한 세상으로부터 본인을 지키기 위해 회사를 다닌다지만, 모두들 줄지어 가는 저 끝에 가면 정말 나를 단단하게 지켜줄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앞으로 내가 일하게 될 10년은 지금까지 지나온 10년보다 더 빨리 지나갈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신입사원의 하루하루는 회의 시간에 볼펜 돌리던 것까지 생각나는데 반해 요즘의 하루는 마치 일주일이 세트로 움직이는 냥 당장 지난주 월요일에 지나간 일도 기억이 안 나니까 말이다. 아이 엄마가 되고 워킹맘의 시간이 찾아오고 나면 후루룩~ 10년은 그냥 지나가버릴 수도 있겠지. 10년이 지났을 즈음에 지금 내 옆에 있는 차장님, 부장님처럼 쫓기듯이 출근하고, 사내정치에 귀를 열고, 희망퇴직을 손꼽아 기다리지 않고 살 수 있을까.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도 되고 싶지 않았지만, 굳이 그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한 선배로 기억되고 싶지도 않았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30대라서 그런가. 둘 중 어느 쪽도 내키지 않았다.

퇴사 면담 때, 어느 임원이 내게 말했다.

김과장이 몰라서 그러지...
나가면 다 가시밭길이야, 여기가 꽃길이라고.


"그래서 제가 직접 걸어보려고 합니다. 그 길이 가시밭길인지, 꽃길인지. 제가 가는 길을 꽃길로 만들어서 맨발로 예쁘게 걸어보려고 합니다. 좋은 사람들과 같이 손잡고 꽃길 실컷 걸어 보고 나서 그 길이 가시밭길이었는지 꽃길인지 이야기해 드릴게요. 제가 직접 걸어봐야겠습니다."


임원은 딱하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지금 세상 무서운 걸 몰라서 그러는 거라며 나를 타일렀다. 일 꽤나 한다는 녀석들, 나가서 이직을 하네 사업을 하네 거들먹 거리다가 결국에는 다 망해먹고 지금 어떻게 사는 줄 아느냐며. 그래도 본인은 큰 회사에서 임원 자리 맡아서 잘 지내고 있다고. 동기들 중에 본인이 제일 잘 살고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런 게 바로 꽃길이라고 내게 강조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임원의 얼굴 위에, 지난번 회의에서 사장님의 억지 발언에 아무 말 못 하고 땀 흘리던 모습이 겹쳐 보이던 건 나만 그랬던 것일까. 벌써 그는 그날의 기억을 잊은 듯했다.


요즘 나는 스스로 '꽃길 걷는 여자'라고 주문을 외우곤 한다.
물론 (남편한테 말하진 않았지만) 줄어드는 통장 잔고에 내 마음도 함께 쪼그라드는 기분이고, 남들은 앞서서 나가는데 하루하루 나만 뒤쳐지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도 된다. 걱정이 안 된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겠지.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30대 여자가 걱정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바스락 거리는 멘탈을 부여잡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 노력한다.

매일매일 내일을 꿈꾸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아이디어들을 공유하고, 마음에 담을 글을 읽는다.

항상 궁금했던 오후의 지하철도 타보고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다. 낮 시간에는 사람이 없어서 항상 앉아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던 건 순진한 나의 오산이었다. 앞으로 만날 세상도 이렇게 내 기대와 다른 걸까. ;;;) 퇴근하고 나서는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엄두도 못 냈던 동네 유명 빵집에도 여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 유난히도 더운 날에는 예정에 없던 늦잠도 자보고, 비 오는 날에는 멍하니 창 밖만 보고 서있기도 한다.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 평일 오전에 한다는 미술관 프로그램에도 다녀오고, 괜한 점심 약속도 잡아본다.

솔직히 잘 해낼 수 있을지 조금 겁이 나는 게 사실이다.

10년 동안 의지했던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내 열정이 아직 남아있을 때 해야 할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더 단단한 꿈을 꾸고, 나만의 콘텐츠를 만들고, 그걸 많은 사람들이랑 나누면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그렇게 내가 가꾼 꽃길을 더 많은 분들과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지금은 조금 힘들고 부족하더라도 좋은 일, 행복한 소식들이 앞으로 더 늘어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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