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련화 Apr 20. 2019

한밤의 취향

 아이를 재우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노라면 못다 한 집안일 생각이 스멀스멀 떠오른다. 며칠 전 엄마와의 전화통화에서 톡 하니 쏘아붙이지 못한 말들이 눈 앞에 어른거린다. 한쪽 머리로는 이번 달 생활비를 열심히 셈하고 있고, 나머지 한쪽 머리로는 내일 찬거리에 쓰일 식재료를 냉장고에서 뒤적거린다. 아이는 잠들었지만 나는 미처 잠들지 못한 경계의 시간이 흐른다. 육아의 노고에서 잠시 벗어나는 시간. 오롯이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인 동시에 엄마가 아닌 모습에 방황하는 나와 만나는 시간이다.

  

 머릿속에 글감이 사정없이 떠오른다. 첫 문장은 이렇게 쓰고, 문장의 마무리는 이렇게 하면 좋을 거야. 같은 문장을 몇 번이고 고쳐 쓴다. 꼭 맞는 단어가 없을까 눈을 굴려본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손끝까지 차올라 당장 서재로 달려가 노트북을 켜고 타자를 쳐대고 싶다. 잠시 내 마음속을 스쳤던 문구,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따뜻한 순간에 대한 묘사. 글감은 거침이 없고, 동시에 경계도 없다. 하지만 망설이다 망설이다 끝내 눈을 감고 만다. 욕망으로 차오른 손가락 끝에는 노트북 자판이 아니라 아기의 보드라운 손가락을 살짝 걸쳐둔다. 그렇게 눈을 감은 지도 몇 달째. 한밤을 휘달리는 내 취향들은 그렇게 컴컴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이가 늘면서 겁이 늘었다.

 나이가 늘면서 걱정도 늘었다.

 그것들은 내 아랫배에 옹기종기 붙은 살들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내 몸에 엉겨 붙었다. 좀처럼 떨어질 생각도 않고, 제 집인 양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말았다. 나는 그것들에게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고야 말았다.

 

 무엇보다 타인의 시선에 예민해졌다.

 누가 뭐라고 하던지 내 갈길을 가겠노라고 외쳤던 적이 있었다.

 적지 않게 재수 없어 보였을지 모르는 그 시절. 적어도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고, 평가에 대해 연연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오래오래 살 만큼 욕도 많이 먹었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만큼 마음이 젊었던 것일까.


 지금은 그때에 비해 드러내 놓고 살지도 않으면서 눈치 보는 날이 늘었다.

 내 글을 읽은 누군가가 보잘것없는 글이라 평할까 봐, 이런 글 따위를 썼냐고 타박할까 봐. 억지 공감을 이끌어 낸다는 핀잔을 들을까 봐. 공감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을 부풀려 쓴 글이라는 소리를 듣게 될까 봐 손가락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예전보다 적게 드러내면서도 늘 눈치를 보며 사는 삶이다.

 아이를 낳고 키운 지 꼬박 20개월. 그간 내가 가지고 있던 두터운 방어막이 조금씩 조금씩 얇아지기 시작해서 이제는 주변의 사소한 시선에도 상처 받고 찢겨나갈 것을 알기 때문에 자연히 몸을 움츠리고 마음을 한 번 더 여민다. 나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가끔씩 입 안이 쓰다. 가슴팍이 까슬거린다.


 내가 쓰고 싶은 문장이 아니라 날이 서 있지 않은 무난한 문장을 쓰려다 보니 재미가 없다.

 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누구의 것도 아닌 글만 남는다. 한밤을 휘달렸던 내 취향은 흐려지고 뭉개지고 페이지 너머로 밀려나 버렸다. 


 지나간 댓글들을 주욱 훑어본다.

 곱씹어 살펴볼 용기가 없어 눈대중으로 휘갈겨 읽어본다. 그러고는 다시금 몸을 움츠린다.

 몇 번이고 다시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딸깍거려 보았지만 오늘도 실패다.

 내 취향을 담은 문장들은 오늘 밤도 어김없이 노트북 속에 고이 묻어 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