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없이 훌쩍 떠나버린 것은 아니었다. 벌써 몇 달 전부터 이야기를 꺼냈고, 내게 미리 허락도 구했다. 떠나는 그 날까지 미안한 내색을 풀풀 풍기며 떠났다. 남편은 그렇게 유난을 떨었지만 정작 멀리 가지는 못했다. 결국 엎어지면 코 닿을 제주도에 갔다.
남편의 입사동기들과 함께 가는 '입사 10주년 기념 여행'이었다.
나는 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쉽지 않으니 이번 기회에 해외여행을 가라며 부추겼다.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외국물을 먹어보냐며 헛바람도 넣었다. 하지만 소심한 아저씨들은 결국 남아있는 가족 걱정에, 며칠 안 되는 휴가 걱정에, 무엇보다 와이프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제주도행을 결정했다. 아, 불쌍한 이 시대의 가장들이여.
사실 남편의 회사 시간은 퇴사와 함께 8년 차와 9년 차 사이 어디쯤에 멈춰버렸다. 굳이 따지고 보면 입사 10주년 기념이니 남편은 자격미달인 셈이다. 그 자리에 불러준 동기들에게 남편이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가게를 비우는 일정까지 불사하고 따라나선 남편에게 동기들이 고마워해야 할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리송하다. 어쨌든 특별한 사람들과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남편이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누군가의 아빠가 되면서 남편 혼자 보내는 시간이 부쩍 줄었다. 3일 동안만은 이런저런 걱정을 접어두고 그저 또래 친구들을 만난 철없는 남자아이처럼 신나게 놀고 왔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비행기를 탄다고 짧은 동영상을 찍어 보냈다. 요즘 들어 한창 비행기와 헬리콥터에 관심이 많은 우리 아들은 영상 속에 나오는 비행기를 보고 우와~ 하는 탄성을 연발했다.
"이거 아빠가 탈 비행기야. 나중에 시윤이도 엄마랑 같이 비행기 타러 가자!"
"뱅기, 빙기, 행기..."
동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눌러보는 녀석을 보며 문득 여행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내가 마지막 여행을 다녀왔던 때가 언제였더라.
내가 가지고 있던 여행에 관한 추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남편이 없는 3일 동안 독박 육아에 시달리는 어려움을 투정하고 싶지도, 다음에는 기필코 아이를 맡기고 나 혼자 떠나겠다는 다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예전의 추억들을 되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작지만 이런 여유가 늘었다. 내가 당장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심이 줄었고, 있는 그대로를 즐길 줄 아는 나름의 요령이 생겼다.
나의 소중한 추억들 속엔 귀한 여행들이 몇 개 있다.
단연 최고로 꼽는 것은 엄마와 함께 떠난 7박 8일 제주도 올레 걷기 여행이었다. 걷기 좋은 때를 정한다고 10월 말쯤 떠났는데 7월부터 틈틈이 운동을 하며 몸을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신입사원 시절이었는데, 여름휴가도 안 가며 3개월 전부터 파트장에게 졸라 일주일 휴가를 얻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철이 들고 떠난 가장 긴 여행이었고, 태어나서 가장 많이 걸었던 날들이었다. 매일 20킬로 가까이 걸으면서 제주도의 아침햇살과 차가운 밤공기를 느꼈다. 그때의 풍광, 그때의 공기는 아직도 내게 생생하다.
나 홀로 떠났던 유럽 여행도 잊을 수 없다. 나이가 서른이나 되어서 대기업이나 다닌다면서 해외여행 한 번 가보지 못했냐는 소리에 욱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제법 긴 해외여행인데 제대로 준비도 못하고 그냥 떠났었다. 왠지 스페인에 가보고 싶어서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스페인 도시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에 5일 머물렀고, 유럽을 다녀왔으면 런던에는 가봤다고 해야 할 것 같아서 런던에 5일 머물렀다. 서투르고 어설퍼서 모든 순간이 에피소드였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그 골목, 그 상점이 눈에 선하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바르셀로나의 신비한 야경과 런던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하늘이 만져질 듯 보인다.
나의 퇴사 기념으로 남편과 강원도로 떠난 여행도 재미있는 추억 중에 하나다. 인생 잭팟의 시작이라며 정선 카지노에 숙소를 잡았는데, 정말 카지노에서 잭팟이 터지고야 말았다. 누군가에겐 적은 금액일지 모르지만 당시 여행 경비를 너끈하게 뽑고도 남았으니, 정말 나의 퇴사는 내 인생의 잭팟이었을까. 남편과 함께 본 그 해 강원도의 단풍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뻤다.
몇몇 기억들을 되짚어 보다 보니 그간 떠났던 여행들을 다시 기록해 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별한 의미를 두고 떠난 여행은 다녀와서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남편의 휴일에 가볍게 떠난 당일치기 나들이는 또 그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다. 어느 것 하나 사소하지 않다. 모든 여행에는 그 때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 녹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여행은 찰나의 순간까지도 선명할 때가 있다. 의미가 계속 되새겨지는 여행이다. 반대로 어떤 여행의 추억은 흐려지고 뭉개져서 자꾸 다른 추억들에 뒤섞이는 경우도 있다. 누구랑 갔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희미해져 버렸지만 내가 정말 환하게 웃고 있었다는 것만은 명확히 기억날 때도 있다. 영상이 아닌 사진으로 남은 여행들이다.
내가 떠난 여행이 장편 소설이면 어떻고, 짧은 에세이면 어떻고, 또 단 한 장의 스냅사진이면 어떤가.
그 순간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즐거웠다면 그것으로 여행의 역할은 다 한 것이 아닐까.
남편이 떠난 지 이틀째, 남편이 그곳에서 많이 웃고 돌아왔으면 한다. 기분좋은 에너지로 가득 차서 돌아올 그 사람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