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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화 May 28. 2019

육수 예찬: 제 요리는 육수가 다합니다

 항상 내 요리는 분주했다.

 하는 일이 많고, 만들어 내는 요리의 가지 수가 다양해서라기보다 워낙 실력이 없으니 그저 마음만 급했다. 요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잘 해내지 못하니 매번 번거로웠고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물은 초라했다. 제법 맛이 괜찮다는 평가를 들을 때 조차도 나 스스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이 정도 공을 들였으면 더 맛있어야 정상인데... 늘지 않는 실력에 그저 고개 숙일 뿐이었다.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제일 걱정되었던 것이 바로 내 요리실력이었다.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을 것인가. 늘지 않는 실력에 대한 걱정보다 평생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요즘 맞벌이 부부들은 살림을 나눠서 한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혼자일 때보다 요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 뻔했다. 엄마 뒤에 숨어서 어찌어찌 버텨왔던 삼십 년. 앞으로 요리 앞에 내 몸뚱이가 고스란히 노출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아이를 낳으면 어떻겠는가. 어린아이한테 요리를 시킬 수는 없으니 또 내가 주방에 많이 서게 될 텐데... 태어나지도 않은 녀석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필이면 우리 집에 와서 네가 고생이겠구나.


 남편에게 큰 그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신혼 초에 남편은 내 요리에 대해 따뜻한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늘 맛있다고 했고, 비슷한 메뉴들을 자주 주문했다. 한 번 두 번 경험이 쌓이면서 몇몇 개 메뉴에 대해서는 서서히 비슷한 맛을 낼 수 있게 되었다. 내 요리에도 맛이라는 것이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한껏 들뜬 기분에 취해있을 때, 남편은 자연스럽게 다른 메뉴를 권해주었다.

 "이거 한 번 해볼 수 있겠어? 집에서도 할 수 있는 메뉴인가 모르겠네. 요즘 계속 먹고 싶더라고..."


 잔머리(?) 좋은 남편 덕에 요리 실력이 조금씩 늘어갔다. 자신감도 생기고, 하고자 하는 의지도 생겼다. 레시피 어플을 다운로드하여서 쓰게 되었고, 나만의 레시피를 적은 노트도 가지게 되었다. 요리와 살림에 관한 책들도 몇 권 읽어 보았다. 흔히들 말하는 재미라는 것이 조금 붙기 시작했다.


 요리에 관심을 두고 나니 슬슬 육수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찌개나 국을 끓일 때마다 육수를 내려고 하니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번거로운 건 둘째 치더라도 매번 들어가는 재료도 아까운 것 같아서 맹물을 몇 번 써봤더니 맛이 영 볼품없었다. 남편은 새색시 맛이 난다고 했다.

 가스비 몇 푼 아낀다고 주저하던 육수내기를 시작했다. 정기적으로 멸치와 다시마를 주재료로 집에 있는 재료들을 몇 가지 더 넣고 넉넉하게 육수를 냈다. 큰 솥에다가 물을 낙낙하게 잡고 뭉근하게 끓여주니 예전보다 진한 육수를 얻을 수 있었다. 작은 통에 나누어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면 어느 요리에나 쉽게 사용할 수 있어서 간편했다. 당연히 맛의 풍미도 더해졌다. 요리 시간이 단축되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무엇보다 육수내기의 가장 큰 장점은 요리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이다. 간단한 찌개 하나에도 허둥대던 옛날과는 달리 금방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들어찼다.

 "육수가 있으니까 금방 할 수 있어. 얼마 안 걸려."

 육수를 내기 시작하면서 주방에 선 나는 한결 여유로워졌고 좀 더 민첩해졌다. 비로소 주부가 된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식단을 짜고 사야 할 찬거리들을 적어 마트에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 가방엔 장바구니가 필수품으로 들어앉았고 동네 마트의 할인행사를 주기적으로 찾아보게 되었다.


 그런데 어디 육수뿐일까.

 요리하는 것을, 살림하는 것을 누구보다 두려워하던 내가 당분간(당분간이라 믿고 싶다) 전업주부의 길을 선택하면서 익숙해지고 민첩해진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나름의 기술이 늘고, 잔꾀가 생겨 어수룩하던 처음에 비해서 많이 노련해졌다. 이게 뭐라고 집에 있는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뭔가가 조금씩 늘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주부가 되어가는 모습이 내겐 참 낯설다.

 그리고 이렇게 익숙해져 가는 게 가끔은 겁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고민에도 불구하고, 정신없이 아이에게 밥을 떠먹이고 세탁기를 돌리고 육수가 끓고 있는 솥에 다가가 불 조절을 하고 있는 내가 조금은 웃기기도 하다.


 "그래. 이왕 하기로 한 거 잘해봐야지."

 시계를 거꾸로 돌려 10년 전의 나였다면 이런 내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10년 뒤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부엌 가득 퍼지는 멸치육수의 짭조름하면서도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금세 고개를 내저으며 오늘의 나로 돌아왔다.

 '멸치를 벌써 다 먹어가네. 다시 멸치 한 박스 사서 머리 따고 똥 빼려면 한참 걸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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