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애증의 물건이 하나 있다. 첫째의 산모수첩.
어떤 엄마들은 산부인과 진료가 있을 때마다 아기를 위한 사랑의 메시지도 남기고 초음파 사진 옆에 스티커도 붙이고 요리조리 꾸미기도 하면서 아기를 위한 멋진 추억 선물을 만들기도 한다는데... 난 산모수첩에 영 정을 붙이지 못했다. 담당 의사 선생님 또한 지나치게 유쾌한 분이라 나의 산모수첩은 엄마의 무관심과 선생님의 꼬부랑글씨의 합작품으로 구석지기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어떤 검사를 하고 어떤 특이사항이 있는지 꼼꼼하게 적어주신다는 옆 방 여자 선생님의 산모수첩을 훔쳐보면서 초음파 사진이나 잃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내 산모수첩의 끄트머리에는 열 달 동안 받았던 초음파 사진들이 뭉텅이채로 꽂혀있다. 그러다 나중에 초음파 사진 없어졌다고 울지나 말라던 남편의 엄포가 무서웠던 것일까. 다행히 한 장도 잃어버리지는 않았다.
둘째의 초음파 사진을 받아 들고 와서 그 애증의 산모수첩을 다시 꺼내보았다. 까만 점이 하나 콕 찍혀있는 첫 번째 초음파 사진. 문득 첫째의 첫 진료 날이 기억났다. 병원을 나서면서 나는 괜스레 아랫배에 손을 갖다 대었고, 오빠는 나를 살짝 부축해주는 시늉을 했다. 그때 내 뱃속에는 정말 작은 콩알이 하나 있었을 뿐이었는데.
"내가 그랬다고? 진짜? 정말 오버했네~"
"진짜 그랬다니까. 진료실에서 나와서 우리 둘 다 웃었잖아. 나 그래서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고~ 정말 웃기지?"
"듣기만 해도 웃긴데? 우와~ 내가 그랬다고?"
첫째와 둘째의 첫 모습은 신기하게도 똑같았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콩알만 한 녀석들이라 똑같을 수밖에. 흐릿한 화면 중간에 까만 점이 하나씩 콕콕 박혀 있었다. 아기도 아닌 것이, 아기집도 아닌 것이... 그저 뭉뚱그려진 한 덩어리에 불과한 까만 점. 우리 둘째는 지금 0.72cm라고 했다. 첫째도 아마 그 정도였겠지.
문득 그 까만 점을 꼬박 30개월 동안 키워낸 것이 지금 내 옆에 새근새근 잠자고 있는 이 귀염둥이 녀석인가 싶어 마음이 울컥했다. 내 뱃속에서 열 달, 그리고 세상에 내어놓고 스무 달을 넘게 키웠더니 이젠 제법 제 힘으로 걸어 다니고 말도 하게 되었다. 뭉개진 발음이지만 '시져~'하면서 의사표현도 하고 굳이 안 해도 될 힘자랑도 꽤나 해댄다. 그 작은 콩알 하나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람으로 만드는데 꼬박 30개월이 걸렸다.
지금 내 뱃속에 있는 이 까만 점은 30개월 뒤에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 어떤 표정으로 내게 안기고, 조그만 입술로 어떤 말을 하며, 또 얼마나 깔깔거리고 웃어댈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잠시 동안 내 머릿속에 들어찼던 둘째에 대한 두려움이 먼발치로 사라진다. 작은 콩알이 빨리 자라주었으면, 튼튼한 모습으로 내 곁으로 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더 크게 다가온다.
우리가 다시 만날 즈음에 둘째는 얼마나 자라 있을까. 2cm? 3cm? 생각해보면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데, 녀석이 이미 우리에게 주는 행복의 크기는 두 손 한 아름에도 담지 못할 만큼 크다. 벌써부터 녀석은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넘치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 몸을 두 배, 세 배씩 키워가며 우리에게 올 준비를 시작한 녀석의 열 달을 옆에서 조용히 응원해 주어야겠다. 내 뱃속에 있는 작은 점 하나가 무엇이 될지는 내가 정할 수 없다. 첫째를 키우면서 알게 되었다. 그건 내가 정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정해서도 되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작은 점 하나가 겪게 될 앞으로의 시간 동안 조용히 옆에서 지켜봐 주는 일. 아이가 마주하게 될 수많은 처음을 함께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게 엄마의 역할이 아닐까. 아이가 내게 준 행복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둘째를 품고서 내가 한 뼘 더 자라는 중이다.
점 (피터 레이놀즈 글/그림, 김지효 옮김, 문학동네)
임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그림책은 아니다.
다만 내 아이가 조그만 점을 그려왔을 때, 과연 나는 어떤 말을 아이에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어떤 부모가 좋은 부모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작은 점을 그리고 있는 아이가 싱긋! 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말을 해줄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다.
그리는 대로 (피터 레이놀즈 글/그림, 엄혜숙 옮김, 나는별)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은 자유로워서 좋다. 그림이나 색깔 모두 꽉 막혀있는 답답함이 없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그렇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나의 첫 하늘도 파란색이었던 것 같다. 파란색 물감이 없다면 나는 하늘을 무슨 색으로 칠했을까? 과연 다른 색으로 칠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살다 보니 하늘은 파란색이 아닐 때가 더 많다. 분홍색도, 보라색도, 회색도 하늘 색깔이다. 하지만 지금도 내게 하늘을 칠하라고 하면 으레 파란색 물감을 집어 들게 분명하다. 내 아이의 첫 하늘은 무슨 색깔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