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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화 Mar 12. 2018

한 살 이라도 젊었을 때 낳았어야 했습니다.

조리원 커뮤니티

 조리원에서 마련해 준 강의 프로그램을 듣기 위해서 옆방 엄마랑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엄마들이 분홍색 옷을 마치 단체 유니폼인 양 입고 있는 모습이 이제는 정감있게 느껴진다. 벌써 조리원 생활에 익숙해진 것인지 분홍색 옷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조리원에서 듣는 강의 프로그램이라는 것이 사실 패키지 관광에 붙어있는 대가성 쇼핑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워낙 육아에 문외한이었던 내게는 도움이 되는 내용도 꽤 많았다. 의미 있고 알찬 시간이라기 보다 엄마가 되는 최소한의 준비 시간이라고 생각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강의 프로그램이라 쓰고 쇼핑이라 읽는 이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때 누군가 거실을 가로질러 휑~ 하니 지나갔다. 조리원에서 보기 드문 빠른 속도. 옆방 엄마랑 나는 눈을 껌뻑이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금 지나간 사람... 현이 엄마 아니에요?"
 "그런 것 같은데..."
 "아주 빠르던데... 휑하니 지나가는 모양새가 산모 아닌 거 같고만."

 얼마지않아 현이 엄마는 반대쪽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갔다. 급히 식당 옆에 있는 공용 캐비닛에서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는 모양이었는데, 무슨 속 사정이 있는지는 저녁시간에 물어봐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일까. 그 순간 나는 내 분홍 옷에 가려진 두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벼운 그녀의 발걸음에 괜히 주눅 든 것일까. 강의가 끝나고 방에 돌아와서도 시무룩한 기분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여보. 오늘 현이 엄마가 거실에서 나풀나풀 뛰어가는 거야. 나는 어그적 거리며 걷는 것도 힘든데."
 "젊어서 그런가."
 "그 엄마는 수유도 양반다리 하고 먹인데. 나는 아직 잘 안되는데... 낑낑."
 "젊어서 그런가 보네."
 "아오~ 당신 이러기야? 난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고~;;;"
 "ㅋㅋ 농담이야 농담. 현이가 좀 일찍 태어났다고 하지 않았어? 며칠 지나면 여보도 금방 회복될 거야. 걱정 마."

 아이가 태어나기 전, 산부인과에서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요가를 하며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말은 산모의 나이에 따라 회복 속도가 엄청나게 차이 난다는 것이었다. 20대 초반 산모들은 자연분만 후에 몇 시간 지나지 않아 혼자 걸어 다니는데, 30대 중후반 이후 산모들은 조리원 가는 그날까지 침대에 딱 붙어서 누워있다는 이야기. 출산 전에 열심히 운동을 하라는 독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30대 중반에 들어선 나에게는 남일 같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아이를 낳고 보니 정말이지 온몸 구석구석이 아팠다. 회복이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평소 나의 저질체력 때문이라고 믿었지만, 완전히 나이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고, 동시에 나이는 못 속인다는 말 또한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 더 일찍 결혼해서 더 일찍 아이를 낳았다면 어땠을까. 새털같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조리원을 누비고 다닐 수 있었을까. 침대에서 일어날 때에 어김없이 나는 아고고고 소리, 수유하고 나서 허리를 펴면서 으~~ 하는 소리가 조금은 줄었을까. 높은 하이힐을 신고, 똑떨어지는 정장을 입고... 아침저녁 출퇴근 시간에 또각거리며 거리를 지나던 결혼하기 전의 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까 저 보셨어요? 잠깐 외출해야 하는데 현이가 갑자기 응가를 하는 바람에 정신이 없었지 뭐예요."
 "안 그래도 후다닥 뛰어가길래 무슨 일인가 했어요."
 "사복 입고 외출 나가는 거 봤는데 완전 딴 사람이던데?! 누가 지난주에 아기 낳은 산모라 하겠어."
 "진짜 진짜. 현이 엄마는 살도 하나도 안 찌고, 대단해~"
 "일찍 아기 낳으라는 어른들 말씀이 틀린 게 하나 없다니까."
 저녁 자리에서는 나이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이젠 어리다는 말보다 젊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30대 중반.
 내가 좀 더 일찍 엄마가 되었더라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여보. 결혼하고 바로 아기 가질걸 그랬나 봐. 우리 결혼도 일찍 한 거도 아닌데, 괜히 여유 부렸나 싶기도 하고. 둘째도 낳을 건데, 첫째가 너무 늦은 건가 싶네."
 "왜?! 후회돼?"
 "아... 결혼도 좀 일찍 할걸. 아기도 좀 더 일찍 낳을걸. 결국 다 할 건데 왜 그리 늑장 부렸을까."
 "더 일찍 결혼했으면 나를 못 만났을 거고, 아기를 더 일찍 낳았으면 우리 시윤이가 이 세상에 없었겠지. 지금도 충분해. 좋게 생각해. 그래야 빨리 회복도 되고, 둘째도 낳지. 안 그래?"

 늦은 밤.
 몸은 느리고, 마음은 한없이 급하기만 한 초보 엄마는 오늘도 뭉게뭉게 생각 구름 속을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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