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보수는 어디로 가는가?
2025년 10월 21일, 일본 헌정사상 첫 여성 총리 다카이치 사나에가 취임했다. 언뜻 보면 역사적 순간이다. 그러나 이 장면을 단순한 ‘여성 리더의 탄생’으로 읽기엔 맥락이 지나치게 무겁다. 다카이치는 ‘여자 아베’로 불릴 만큼 강경 보수의 정통 후계자이며, 그녀의 등장은 일본 정치가 다시 한 번 국가주의의 서사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정치적 배경: 아베노믹스의 유령
다카이치의 정치 기조는 ‘사나에노믹스’라 불리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베노믹스의 연장선이다. 적극적 재정지출, 금리 완화, 국채 발행을 통한 경기 부양 등 익숙한 문법 위에 ‘경제안보’라는 새로운 구호가 덧씌워졌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성장은 ‘시장’이 아니라 ‘국가’를 위한 성장이다. 국방, 기술, 산업의 자립을 중시하는 국가 중심의 성장 모델은 전후 일본이 잃었던 ‘국가의 자존’을 복원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문제는 이런 방향이 경제 활력보다는 정치적 상징에 치우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성장보다는 체제의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쪽으로 흐를 것이다.
외교의 언어: 강경함과 실용주의의 동거
다카이치는 미국과의 동맹을 절대축으로 삼는 인물이다. 미일 안보체제의 재확인을 넘어, 인도·태평양 전략의 전진기지로 일본을 위치시키려 한다.
그녀는 ‘자주국방’을 말하지만, 그 자주란 미국이 허락한 범위 안의 자율성이다. 독립을 말하지만 종속의 구조는 그대로다.
한편 한국에 대해서는 “중요한 이웃 국가”라며 협력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는 경제와 안보의 실용적 협력에 국한된 발언이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나 독도 문제에선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한다.
결국 한일 관계는 현실적 이해관계로는 가까워지고, 상징의 차원에서는 멀어지는 이중적 구조를 계속 이어갈 것이다.
사회적 맥락: 여성 총리, 그러나 페미니즘은 없다
다카이치는 여성 리더지만, 젠더 평등과는 거리가 멀다. 그녀의 등장은 여성 정치인의 진출이라기보다, 보수 권력이 여성의 얼굴을 빌린 사건에 가깝다.
일본 사회가 안고 있는 인구 감소, 노동력 부족, 젠더 불평등 같은 구조적 문제에 그녀가 근본적 해법을 내놓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전통적 가치’와 ‘가족 윤리’를 강조하며 사회를 더 보수적으로 재편할 수 있다.
즉, 다카이치 내각은 일본의 미래를 진보시키기보다, 과거의 영광을 관리하는 정부가 될 것이다.
한일 관계의 전망
경제와 안보에서는 협력이 강화될 것이다. 기술 공급망, 반도체, 에너지 전환 같은 현실적 사안에서 일본은 한국과의 공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감정의 층위는 다르다. 일본의 보수층은 여전히 역사 인식의 전환을 거부하고 있고, 한국의 대일정책은 현실적 실익을 우선시하며 ‘기억의 정치’를 뒤로 미루고 있다.
이 불균형은 언제든 다시 터질 수 있는 갈등의 씨앗이다. 협력이 이어져도 신뢰는 축적되지 않는다.
‘강한 일본’이라는 불안의 이름
다카이치 시대의 일본은 표면적으로 강해 보이겠지만, 그 강함은 자신감이 아니라 불안의 다른 표현이다. 경제 정체, 인구 감소, 지정학적 압박 속에서 일본은 다시 ‘국가의 자존’을 부활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로 나아가는 힘이라기보다, 과거의 영광에 대한 향수다.
‘강한 일본’이라는 말 속에는 ‘지쳐 있는 일본’이 숨어 있다.
다카이치 사나에의 시대는, 결국 일본이 스스로의 상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녀의 정치가 일본 사회를 통합할지, 아니면 또 한 번의 내적 균열을 낳을지는 이제 막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