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품 추첨으로 보여지는 삶의 태도

"난 항상 안되" 인가, "나는 될꺼야" 인가?

by 우주사슴

경품추첨이나 뽑기 같은 걸 할 때 항상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난 항상 안되더라.”

이 말은 경험의 보고처럼 들린다.
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실은 결과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태도에 가깝다.
이번에도 안 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앞으로도 안 될 것이라는 결론을 현재형으로 끌어온 문장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이미 끝난 일처럼 말한다는 점에서, 이 말은 관찰이 아니라 규정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꽤 합리적이다.
경품 추첨의 당첨 확률은 낮다.
대부분은 떨어진다.
기대하지 않는 태도는 계산적으로도 손해가 없다.
여기까지는 누구도 반박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계산에는 자주 빠지는 문장이 하나 있다.
누군가는 반드시 된다는 사실이다.
확률이 0이 아닌 한, 당첨자는 구조적으로 발생한다.
낮은 확률과 실제 당첨은 모순이 아니다.
같은 확률 체계 안에 동시에 존재하는 사실이다.

문제는 “확률이 낮다”는 인식이
“그래서 나는 안 된다”라는 말로 바뀌는 순간부터다.
이때 확률은 계산을 멈추고 신념이 된다.
집단의 통계였던 것이 개인의 운명 선언으로 굳어진다.
여기서 말의 힘이 개입한다.

말은 현실을 직접 바꾸는 주문은 아니다.
하지만 사고의 경계를 고정하는 힘은 분명히 있다.
“확률이 낮다”는 말은 열려 있다.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여백을 남긴다.
반면 “난 항상 안된다”는 말은 닫혀 있다.
가능성을 언어 차원에서 먼저 삭제해 버린다.

이 말이 반복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안정감 때문이다.
미리 안 된다고 말해 두면, 실패는 더 이상 사건이 아니다.
예상된 결과이고, 확인된 세계관이다.
“역시나”라는 말은 실망이 아니라 안도에 가깝다.
불확실성을 제거했고, 세상이 내 말대로 움직였다는 느낌을 얻는다.

여기서 하나의 역설이 생긴다.
안정을 얻기 위해 기대를 내려놓았는데,
그 과정에서 확률을 다루는 태도 자체가 훼손된다.
확률은 개인을 미리 분류하는 판결문이 아니다.
각각의 시도에서 개인은 논리적으로 언제나
‘될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나는 안 되는 쪽”이라는 말을 반복하는 순간,
수학적으로는 게임 안에 있으면서
언어적으로는 이미 탈락해 있다.

그래서 중요한 구분은 이것이다.
기대하지 않는 것과 단정하는 것은 다르다.
“확률이 낮으니 기대하지 않는다”는 계산이다.
“그래서 나는 안 된다”는 신념이다.
계산은 상황에 따라 갱신되지만,
신념은 반복될수록 정체성이 된다.
말은 그 신념을 가장 빠르게 굳히는 도구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낙관을 권하는 글이 아니다.
설레며 기다리자는 주장도 아니다.
확률을 무시하자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확률을 존중한다면,
미래를 단정하는 말을 먼저 꺼낼 이유는 없다는 이야기다.

안 될 가능성은 크다.
그래도 누군가는 된다.
그리고 나는,
그 가능성이 확률 안에 있다면
그래도 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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