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키의 Art of Life

요시키가 밀어 붙인 삶의 방식과 태도

by 우주사슴



아트 오브 라이프는 29분짜리 대곡이다. 이 길이는 실수도 과장도 아니다. 이 음악은 처음부터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감상을 요청하기보다는, 그 시간 안에 머물 것을 요구한다. 클래식과 메탈을 무리하게 결합한 형식, 불친절한 피아노 솔로, 감정을 정리하지 않은 채 끝까지 밀어붙이는 전개. 이 곡은 잘 만든 노래라기보다, 끝까지 가보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나는 10대였다. 1998년에서 1999년 사이, 일본 대중문화가 막 개방되려던 시기였다. 당시 X JAPAN은 공식적으로 소비되는 음악이라기보다, 복사된 테이프나 백판 CD로 은밀하게 접하던 이름이었다. 금기를 넘는다는 감각 자체가 이미 음악의 일부처럼 작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아트 오브 라이프의 피아노 솔로를 처음으로 다 들었을 때, 그것이 음악인지 감정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기대와 긴장이 동시에 올라왔고, 곡의 플레이 타임이 지날수록 이것의 끝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곡이 종반으로 향하며 피아노가 불협화음으로 폭주할 때, 요시키의 손가락을 통해 내 안의 감정이 함께 튀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었고, 살아 있다는 감각은 공포와 섞여 있었다. 고통스러운데도 집중이 풀리지 않는 상태였다. 음악은 위로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망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경험에는 시대의 공기가 겹쳐 있었다. 1998년은 히데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가사 속의 죽음과 자기 파괴는 관념이 아니라, 막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의 연장선처럼 들렸다. 여기에 세기말의 불안, 멸망론,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더해졌다. 세상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분위기 속에서, 29분 동안 이어지는 이 곡은 하나의 사투처럼 들렸다. 이해하기에는 너무 이르고, 받아들이기에는 과했던 음악이었다.


아트 오브 라이프의 가사는 요시키 개인의 삶과 분리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의 상실, 성공 이후의 압박,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사고의 흔적이 그대로 들어 있다. 이 곡은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관리하려 하지도 않는다. 고통과 혼란, 집착과 아름다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밀려 나온다. 그래서 곡의 끝에서 남는 것은 명확한 해답이 아니라, 정서적 결론이 유예된 상태다. 음악은 웅장하게 끝나지만, 감정은 해소되지 않는다. 감정이 해결되지 않은 채 계속 순환하기 때문에, 청자는 카타르시스보다 탈진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한다.


이제 와서 이 곡을 다시 들으며 나는 다르게 생각하게 된다. 요시키는 삶을 예술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왔고 그 삶이 음악의 형태로 흘러나왔던 것은 아닐까. 아트 오브 라이프는 선택의 결과라기보다, 그가 살아온 방식이 남긴 흔적에 가깝다. 삶이 먼저 있었고, 예술은 그 부산물처럼 따라 나왔다. 예술은 그에게 삶을 보호하는 장치가 아니었다. 삶의 밀도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을 때, 밖으로 새어 나온 통로였다.


그래서 내가 말하는 “삶을 예술작품으로 만들고 싶다”는 문장은 요시키의 그것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다. 나에게 이 말은 삶을 태워버리겠다는 선언이 아니다. 방치하지 않겠다는 태도에 가깝다. 흘러가버리는 시간과 감정을 그대로 두지 않고, 기록하고, 해석하고, 구조를 부여하려는 선택이다. 고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고통을 통과한 뒤 남은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이 흔적은 폭발의 결과물이 아니라, 축적의 결과물이다.


이 차이는 작지 않다. 요시키에게 예술은 그가 살아온 방식의 결과였고, 나에게 예술적 태도는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의식적으로 다루려는 시도다. 그는 질문을 끝까지 밀어붙였고, 나는 질문이 일상의 선택과 판단 속에서 계속 작동하도록 유지하려 한다. 밀어붙인다는 것은 어느 지점에 도달하는 일이고, 유지한다는 것은 그 질문이 삶 전체에 걸쳐 영향을 미치게 두는 일이다. 둘은 반대라기보다 방점이 다르다.


지금 다시 아트 오브 라이프를 들으면, 맨 처음 들었을 때처럼 감정이 폭발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29분이 어떤 삶의 밀도로 가능했는지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1993년의 요시키는 젊었고, 세계의 중심에 있었으며, 동시에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삶은 이미 극단으로 기울어 있었고, 음악은 그 기울기를 숨기지 않았다.


아트 오브 라이프는 여전히 과도하고, 불친절하고,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분명해졌다. 이 곡이 던지는 질문은 “삶을 예술로 만들 것인가”가 아니라, “너는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그 방식은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에 가깝다. 요시키는 그 당시에 그렇게 표현하며 타올랐고, 나는 그렇게 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29분이 끝난 뒤 남는 것은 요시키가 밀어 붙인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 방식과 다른 방식 사이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조금씩 조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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