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서 머문 사흘
유럽으로 ‘건축 이별 여행’을 떠났다. 예술을 꿈꾸며 건축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현실의 무게가 버거워 점점 비관주의자가 되었다. 이른 나이에 건축을 포기하고, 모든 미련을 내려놓기 위해 떠났다. 그런 내가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서 사흘을 머물며 달라지기 시작했다. 유대인의 절망과 생존을 담은 공간이 길 잃은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까지 체험하지 못했던 삶의 구조로.
첫날, 지하 공간을 몇 걸음 걷다가 되돌아 나왔다. 중정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가쁜 숨을 가라앉혔다. 보통의 박물관이라면 2시간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지하에서 마주한 질문을 지나칠 수 없었다. 커피가 식어갈 즈음, 알게 되었다. 일행과 떨어지더라도, 이곳에 남아야 한다는 것을.
지하층 유리 진열장에 옷가지, 결혼사진, 수용소에 온 가족 편지가 있었다. 어릴 적 미국 방송에서 본 영상은 낯선 언어 속에서도 선명했다. 머리 밀린 나체인 사람들이 하얀 연기 속에서 쓰러지며 뿌연 가루가 되어 개울로 떠내려갔다.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었고, 나에게 홀로코스트는 죽음 그 자체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름을 가졌고, 기억할 만한 일상과 다시 만날 내일을 계획하던 사람들이었다. 유품들이 물었다. 어떻게 다시 기억할 것인가! 죽음이 아닌 삶으로 다시 기억하고 싶었다.
상설 전시장에 올랐다. 전시장은 좁은 길이 한 방향으로만 이어졌고, 창문은 찢긴 상처처럼 벽 곳곳을 핥기며 지나갔다. 독일계 유대인 2,000여 년의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도 있었지만, 내 눈길은 이름 없는 이들의 흔적에 머물렀다. 작고 소중한 것들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타국에서 살아야 했던 그들은 찬란한 유물 대신, 소박한 일상으로 시간을 쌓아 올렸다. 순간, 다시 지하로 내려가, 그들이 어떻게 어두운 시간을 견뎠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지하 복도 끝, 유리창 너머로 ‘추방의 정원’이 보였다. 그들이 떠밀려간 생존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공간이다. 12도 경사진 땅 위에 49개의 콘크리트 비석이 쓰러질 듯했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정원으로 들어섰다. 방향도 중심도 잃은 채, 흔들리는 난파선의 갑판 위를 걷는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내 키를 훌쩍 넘는 육중한 비석 사이로 걸을 때는 숨조차 편히 쉴 수 없었다. 걸을 때마다 기울어지는 몸은 불안정한 그들의 삶을 따라가고 있었다.
휘청이며 고개를 들었을 때, 비석 꼭대기에서 올리브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비석 속에는 이스라엘과 베를린의 흙이 담겨 있다. 뿌리 뽑힌 이들에게 허락된 아주 작은 터전이었다. 올리브는 그 기억 위에 뿌리내렸다. 처음엔 단순한 상징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상설 전시장에서 그들의 예술과 기술, 경제의 흔적을 마주한 이후 달리 보였다. 척박한 땅에 뿌리 내린 올리브는 베를린의 예술과 지성, 경제와 과학을 풍요롭게 하는 올리브기름이 되었다. 가장 작은 비석에 손을 얹었다. 차갑지만 단단했다.
또 다른 복도 끝에 섰다. ‘홀로코스트 타워’의 철문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기울어 있었다. 문이 닫히자, 발소리는 물론 숨소리마저 얼어붙는 어둠 속에 갇혔다. 높은 천장 끝, 날카롭게 잘려 나간 틈으로 빛이 스며들었다. 콘크리트 타워의 어둠을 밀어내기엔 턱없이 희미한 빛이었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문득 야간열차를 탔던 밤이 생각났다. 도난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객실 문 아래로 스며드는 실오라기 같은 빛을 바라보며 밤을 견뎠다. 타워의 빛은 더 이상 희미하지 않았다. 삶의 끝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생존자들의 빛이었다.
마지막 날, 베를린을 떠나는 발길을 돌려 다시 박물관으로 향했다. 불편한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 곳이 있었다. 상설 전시장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관통하는‘기억의 공동(空洞)’이었다. 냉난방도 조명도 설명도 없었다. 바닥에는 만여 개가 넘는 철재 얼굴들이 입을 벌린 채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낙엽’이라는 작품이었다.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이들의 부재는 말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듯했다.
심호흡을 하고 한 발 내디뎠다. 철컹. 다시 한 발. 철커덩. 고개를 숙였다. 입 벌린 얼굴 낙엽들의 표정이 보였다. 참고 걸었다. 철컹, 철커덩, 철컹. 공간이 소리로 차올랐다. 쇳덩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비명 같아서 더 걸을 수 없었다. 걸을 때마다 가해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지나갔다. 차가운 공기를 때리는 맑고 청아한 소리가 울렸다. 종소리처럼, 노래처럼 들렸다. 같은 공간, 같은 낙엽인데 어떤 걸음은 비명이었고, 어떤 걸음은 합창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높낮이와 리듬, 으뜸음도 화음도 없었다. 하지만 음악이었다. 입을 벌린 얼굴의 낙엽들은 각자의 고유한 슬픔을 노래하는 음표가 되었다. 부딪히고 얽히며 끝없이 울려 퍼지는 소리가 비어 있는 공간에 가득했다. 홀로코스트와 희생자들의 부재를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내 발걸음은 아픈 선율로 기억되었다.
첫날처럼 다시 중정에 앉았다. 베를린의 옛 법원 건물과 신축된 유대인 박물관이 어울리지 않는 듯 나란히 서 있었다. 화해 불가능할 것 같았던 두 시대, 두 민족이 었다. 고풍스러운 옛 건물 너머로 금속 마감의 박물관이 날카롭게 꺾이며 지그재그로 나아갔다. 유다의 별이 깨지고, 늘어나며, 비틀린 채로 해체된 형태였다. 안정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어디로 갈지 알 수 없는 내 미래 같았다. 그래도 분명한 건, 다시는 비관주의자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렇게 결심하고 베를린을 떠났다.
20년이 흐른 지금, 나는 도면 대신 글로 삶을 짓는다. 긍정을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지만, 힘겨운 고비도 많다. 그때마다 유대인 박물관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한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입구는 옛 건물에 있다. 과거를 거쳐 미래로, 부정을 통과해 긍정으로 나아가는 길이 내 삶의 구조가 되었다. 지금도 차가운 난간을 붙잡고 어두운 계단을 한 발 한 발 내디딘다.
긍정을 찾아—부정의 심연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