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이 사람들

by space bar

예전에 동경 시내의 노천까페에 앉아 이 사람들을 몇 시간동안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다.

방문자의 싱싱한 눈에는 여러 모습이 들어 온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무심코 눈으로 입력 하다 보니 그들의 체형과 몸짓과 표정에 공통점이 있다.

다양한 굴절이 있는 삐뚤어진 하체

보이기 위한 용도의 확신에 찬 표정

바르고 잰 종종걸음...

그런 것 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중요시 하는 신사를 가 보았다.

지붕 처마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기둥이 우람하여 실제보다 더 크게 보인다.

노천까페에서 몇 시간동안 바라 본 안팎으로 허약한 이 사람들에 비해 건축물의 느낌이 크다.

다시 얘기하자면 절대치가 크다기 보다는 시각적으로 크다.


도심의 쇼핑몰을 들른다.

일본의 예의 그 정교한 장식이 눈에 들어 온다.

징그러울 정도의 치밀함이다.

한 구석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뻬곡히 메운다.

혹 빈 공간이 있다면, 소박함을 진원지로 하는 여백이 아니고 그 또한 인위적인 설정이다.


장식을 배제하고 절제미, 단순함을 추구한다는 젠(zen) 스타일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다.

이 사람들이다. 그 스타일을 시작한 게.

달이 차면 기울고, 넥타이가 넓어지고 좁아지고, 치마길이가 오르락 내리락 하듯이

한 방향을 오래 가다 보면 반대방향을 향하는 때가 온다.

평생을 아니, 수천년을 조상 대대로 자신들의 문화적 허함과 왜소함을 가리기 위해

장식에 몰두하다 보니 당연히 피로감이 몰려 올 수 밖에 없다.

젠 스타일이란 것은 그렇게 이 사람들 곁으로 왔다.

이 사람들이 좋아 하는 '무지'라는 브랜드가 있다.

각각의 아이템들은 담백하나 이것을 배치하는 부분에 가면 이들 특유의 오밀조밀함이 또 보이는 걸 보면

장식하지 않고 살아 보았으면 하는 그들의 간절한 바램이 들어 있을 따름이다.

이 사람들은 결코 zen(禪)할 수 없다.


라멘집이다.

젊은이들이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계속 소리를 질러대며 주문을 받고 음식을 내어 온다.

왜 저리도 서로 소리를 질러댈까?

아마 서로를 동여 매는 결사이리라.

홀로 설 수 없는 허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서로를 묶는다.

그 버릇은 급기야 깃발 뒷꽁무니를 줄지어 따라 다니는 여행패턴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종종걸음은 단체로 모여 다닐 때 유용한 걸음걸이기도 하다.

이 사람들과 말을 하다보면 그들의 과장된 리액션과 말에 힘을 주는 버릇이 거슬린다.

눈은 과도한 확신으로 치장되어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 신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념이 있어 보이는 것에 습이 들었다.

결국은 껍데기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다.


무리지어 통제에 잘 따르는, 그래서 언뜻 보면 질서있어 보이는 이 사람들은 결국 한계를 보인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그 경계의 끝선을 넘어가면, 그 뒷켠에서는 본능의 해방구로 달려간다.

성과 관련한 그들의 도착적 문화와 시내 곳곳에 보이는 빠찡꼬는 가둬 놓았던 이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해소를 말하고 있다.

통제로, 장식으로 가리워진 이 사람들의 야만은 틈만 나면 고개를 든다.


이 사람들.

극복을 하였다.

자신들의 삐뚤어짐, 왜소함 그리고 허약함의 반대를 향하여 열심히 움직였고

그 간절함은 소기의 성과를 거두어 오늘에 이르렀다.

특히 장식하고 착시를 일으키는 버릇은 다름아닌 역사를 자꾸만 짜깁기 하는 데서

그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그들의 야만상태에 가깝던 미천한 과거의 역사는 장식과 확대의 욕구를 불러 일으켰고

천왕이니 황국신민이니 욱일승천이니 하는 '큰' 단어로 집단최면을 걸어 자신들을 결사하고 확대하고 치장하기에 여념이 없다.


극복은 있었던 일을 넘어서는 일이다.

우리도 살아가며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여 단점이 없는 이들보다 더 큰 성과를 이뤄내는 이들을 많이 본다.

극복은 있었던 일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이고 그것이 동력이다.

있었던 것을 외면하고 극복했다함은 장식에 불과하다.

알맹이는 그대로 놔 두고 포장지만 바꾼 것이다.

그들의 버릇대로.


어린 시절에 보았던 투견장에서는 개싸움에 진 개의 짓는 소리가 요란하다.

험한 표정으로 짖어 대지만 그 눈에 들어 있는 공포는 허약한 이 사람들의 눈빛과 닮았다.

걸핏하면 일본의 고위관리라고 하는 이가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 자원해서 갔다가 되는 것인데...

지금은 지난 시간을 미루어 짐작케 하고 다가 올 시간을 가늠케 한다.

지금의, 평시의 비릿내나는 야만이 전시라면 어떠했을까?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는가?

다른 것도 아니고 여인들의 한 맺힌 아픔에 대해 그렇게 얘기하는 지금을 보니

이 사람들은 그리 오래 갈 것 같지 않다.

한 나라를 지탱시켜 줄 가치가 없어 보인다.

원래 치장해야 살 수 있는 허약한 민족이 잘못을 인정 못하는 그 허약함을 또 보이고 말았으니

앞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아

잘 가게.


개 짖는 소리 내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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