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

by space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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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반나절 동안 비가 내렸다.


그 비는 어물전의 생선 머리를 내리치는 칼날처럼 어제와 오늘을 이 계절과 저 계절로 정확하게 나누었다.


간절히 끝을 기다리던 대단했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가고 내 몸은 새벽녘에 팽개쳤던 이불을 끌어안는다.


끔찍한 더위만 가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더위가 갑자기 사라진 지금,


그 더위는 여름 내내 잘 써먹은 핑계였음을 확인한다.


아득해 보이는 하늘과 서늘한 공기는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고 파고드는 스산한 바람은 결국 마음 한 구석에 구

멍을 내고 만다.


그 바람은 더위를 대신하여 새로운 핑계가 되었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그 반복으로 익숙하기에 그것이 삶의 주제가 된다는 것이 멋쩍기는 했지만 올해는 그럴

만했다.


사람은 자연 밖에 위치하는 줄 알았지만 더위에 심하게 흔들렸던 우리의 여름 시간들을 바라보며 우리도 자연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약간의 저온이 오면 한창 떨구던 꽃잎 사이로 새로운 꽃을 뒤늦게 피우는 사과나무와 여름 더위에 에어컨과 선풍기의 스위치를 켜며 애쓰던 우리의 모습에 차이를 느낄 수 없다. 온도에 반응하는 그 내용은 달랐으나 프로그램은 같았다.


사람이 건설하고자 했던 그 위대한 생각들도 자연의 더위와 추위에, 한 점의 구름과 바람에 흔들리며 이쪽으로 가다 저쪽으로 내달렸고, 입장과 이해라는 세상의 한계에 부딪히며 내용을 고쳐 적곤 했다.




오고 가는 계절의 온도를 따라


동물의 털이 짧아지고 길어지고,


나무의 잎사귀가 무성하고 떨어지고,


사람의 옷이 얇아지고 두꺼워지고,


들어왔던 선풍기는 또다시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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