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바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여자들 Feb 12. 2021

요즘, 글은 써?

글 쓰는 여자_바우

친한 선배가 있다. 아주 가끔 연락이 닿는다. 쌓인 얘기가 많아 한 시간 정도 근황 토크를 진행한다. 최근 본 영화나 책, 다녀온 여행지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기본 두 시간. 한참 떠들다가 문득 공백이 생길 때, 관성처럼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근데 넌, 요즘에 글은 쓰냐?

  요즘 글은 쓰세요?      


글을 쓰냐는 말은 당신이 '잘 살고 있냐'는 물음이다. 일상이 무리 없이 유지되는지, 별 탈은 없는지, 뭔가 온전치 못하다면 글로 적어낼 만큼 알아채고는 있는지. 마음이 안녕한지 묻는 말과 같다. 글‘은’ 쓰냐. 그 앞에는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같은 괄호가 생략돼있다. 글에 관한 화제로 넘어오면 여태 부려놓은 이야기가 허무해진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 본격적인 안부인사가 되는 건 뭘까. 글쓰기가 다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상인 걸까.


얼마 전 <호랑이보다 무서운 겨울 손님>이란 영화를 봤다. 좋아하는 두 배우가 나온다. 아직 등단 못한 작가 이진욱과 신인 작가 고현정. 첫 장면에서 이진욱은 소설 쓰기를 '포기'하는데,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시작한 그에게 겨울 동안 반갑지 않은 사건들이 찾아온다. 옛 연인과의 재회란 플롯보다는 영화 끄트머리에 잠깐 비춘 변두리 도시 기차역과 편의점 신이 기억에 오래 남았다. 끊었던 담배를 사면서 이끌리듯 노트와 펜도 하나씩 집어 든 이진욱의 옆모습. 바람 부는 길 위에 서서 고개 숙여 한 자씩 써 내려가는 앞모습. 영화가 끝나고 보니 그를 다녀간 겨울 손님이 누구였는지는 모르겠고, 그가 다시 쓰는 소설이 몹시 궁금했다.      


쉬이 가늠되지 않는다. 쓰기를 포기하는 마음이란 어떤 것일까. 포기해놓고서 다시 쓰는 마음은 또 어떤 것일까.  그것도 오랜 염원이자 삶의 전부인 업으로서의 글쓰기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말하는 순간 그의 삶이 달라진다. 금연을 선언하듯 나 이제 소설 안 써, 라고 말하는 주인공의 첫마디가 결연하기보다 슬프고 담담하게 들렸다. 쓰면서 살고자 했으나 산다는 것 때문에 더 이상 못 쓰겠는, 그래서 안 쓰기로 한 마음. 그런 그에게, 영화 내내 등장하는 인물과 사건들은 글쓰기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쓰라’고 격려하는 게 아니다. 쓴다는 것의 면면을, 그의 타자인 인물로써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전업 작가도 지망생도 아니다. 영화와는 상황이 한참 다르지만, 의지로 안 쓰는 거 말고 의지에도 불구하고 못 쓰는 마음이라면 조금은 안다. 지난 2년 동안 어떤 글도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치열한 고민 끝의 포기가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로 인한 중단이었다. 무엇도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말이 고여 있는 시간 동안, 일상은 무리하게 유지되었으며 마음은 안녕하지 않았다. 뭘 못 썼으니 쓴 게 없었고 결과적으로 나는 안 쓰는 사람이었다.      


지금 나는 쓰고 있다. 그러면 나는 쓰는 사람인가? 글쓰기 수업을 통해 겨우겨우 다시 쓰게 됐다. 강좌가 끝나고 수업에서 모임으로 글 나눔의 성격이 바뀌자, 일주일 한 편에서 한 달 한 편으로 글을 내보내는 횟수도 줄었다. 모임에 합류한 첫날 글쓰기 선배들에게 듣기로는 한 달 내내 못(안) 쓰다가 제출 당일, 즉 디데이에 쓰기 시작한다더니 맞는 말이다. 글이 안 써진다. 촉매제가 없어서인가 싶어 이런저런 책을 읽어봤다. 머리만 복잡해진다.     


사실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이런 게 아니다. 오랫동안 속에서 글이 되지 못한 얘길 꺼내고 싶었다. 문장 한 줄, 단어 두어 개, 이미지 몇 컷으로만 있던 이야기들. 이를테면 “오빠가 말이야,” “삼월도 가고 봄이 왔네요.” “살사는 매력적인 춤이다.” 이런 문장이나 ‘자장가’, ‘매뉴얼’, ‘그러니까’, ‘낙태죄’ 같은 단어들. 아예 제목이 지어진 이야기도 있다. <친절한 지금님>, <면접과 미역죽>, <그녀에게서 온 닥스 스카프>, <청소 알바>와 같은 것들. 아직은 글이 되지 못한 글들이다. <청소 알바>는 서너 편 연작으로 쓰고 싶어 시리즈를 구성해두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할 말이 굉장히 많다. 쓰다가 방금 생각난 소재도 있다. ‘시동생과 처남’, ‘결혼식 전날 밤’, ‘요즘 돌상’. 계속하면 장이 넘어갈 거다.      


낱개로 떠다니는 단어와 이미지들. 글감을 떠올리면 머릿속 이야기는 구체적인 문장과 틀림없는 그 장면을 띄워놓는다. 한 장면, 또 다음 장면. 흐름을 타고 매끄럽게 문장이 연결된다.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흘러가는 속엣말이다. 지금 내 의식에서 나온 글이라고? 멍하니 바라보는 내가 놀라울 만큼 표현은 명확하다. 완성되어있다. 빨리 붙잡아야 하는데 열 손가락 끝에서 몸 밖으로 나오기 전에 사라져 버린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도 어떤 이야길 떠올리기만 하면 타닥타닥 타자기 치듯 이마 위에 곧은 모양의 글자들이 문장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도대체 왜, 전부 지나가고 마는 걸까. 그리곤 왜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걸까.


영화 속 이진욱과 고현정을 보듯, 거의 언제나의 나를 보듯, 쓰며 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이는 사람 만난다. 잘 못 지내있단 뜻이더라도 너무 안타까워 하지 않으려고 한다. 삶이 늘 제대로일 수만은 없으니까. 그렇지만 글쓰기만큼 내 정신적 안위를 구석구석 진단하고 돌봐주는 일이 있나? 어쩌면 내게는 가장 속 깊은 안부인사. 그러니 선배와 연락하 면 또  것이다.


  글은 쓰세요.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쓰긴 쓴다”고 대답하겠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