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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여자들 Nov 19. 2020

엄마의 부엌

글쓰는여자_푸른산

어린 계집아이는 두 손으로 커다란 가마솥의 뚜껑을 힘껏 밀쳐 본다.

“스르륵~” 묵직한 쇳소리가 조심스럽게 울려 퍼진다.

“혹시! 뭐가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계집아이는 곧바로 부엌으로 내 달려온 것이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솥뚜껑까지 열어 보았지만, 가마솥 안은 텅 비어있다. 빈 솥이 익숙한 듯 계집아이는 부엌 한쪽에 놓여 있는 나무 찬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맨 아래에서부터 하나씩 문을 열고 고개를 젖혀 저 안쪽까지 꼼꼼히 들여다보며 무엇인가를 찾는다. 

“여기 있다.” 

환희에 찬 목소리다.     


네모난 부엌, 세 개의 문, 세 개의 아궁이, 세 개의 솥

검게 그을린 천정의 서까래와 흙벽, 마당과 뒤 안으로 연결된 각각의 문, 그리고 광으로 난 또 하나의 문, 세 개의 아궁이 위에 걸쳐진 커다랗고 까만 무쇠 솥 두 개와 양은솥 하나, 아궁이 양옆으로 길게 이어진 부뚜막, 흙으로 된 부엌 바닥, 광으로 들어서는 문 옆 빛바랜 3단 나무 찬장, 찬장 옆 나무 절구통과 절구 대, 부뚜막 위에 놓여있던 까맣게 때가 탄 석유풍로와 함지박 그리고 물을 담아 두던 항아리, 땔감으로 사용할 나뭇단과 불쏘시개, 끝이 타버린 부지깽이.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엄마는 아궁이에 불을 지펴 요리를 했다. 할머니가 아프시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상황이 되자 아버지는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언니를 집으로 내려오게 했다. 그리고 집을 대대적으로 고쳐 난방은 기름보일러로 부엌은 싱크대가 있는 입식 부엌으로 바꾸었다.   

  

부엌을 고치기 전에도 고치고 난 후에도 우리 집은 여전히 손님이 많았다. 큰아버지가 두 분이나 계셨지만, 할머니는 내가 어릴 적부터 아니 한 번도 다른 아들 며느리와 살지 않았고, 집안의 제사도 할머니가 계신 우리 집에서 지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은 늘 밥 먹는 입 식구가 하나, 둘 쯤 느는 것이 다반사였고, 엄마는 그 모든 밥상을 차리고 요리를 했다. 일 년이면 네, 다섯 번 돌아오는 제사에 명절에 할머니와 아버지 생일까지, 여덟이나 되는 식구의 밥상은 수시로 오고 가는 손님으로 아홉, 열 명이 되었고, 제사나 생일날이면 스무 명이 되고 삼십 명이 되었다.

이런 날이면 부엌에 커다란 솥이 세 개나 되었지만, 때때로 뒤 안에 솥을 하나 더 걸기도 했다. 어린 나는 그저 신이 났지만 정신없이 바쁜 엄마 곁에서 언니는 심부름을 도맡았다.     


할머니, 아버지의 생신이 돌아오면 나는 학교에 가기 전에 일찍 일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어른들에게 식사하러 오시라고 전해야 했고, 제사를 지낸 다음날이면 이웃집에 떡과 음식을 나누는 심부름을 해야 했다.     



엄마가 하는 음식도 무척 다양했다. 먼저 제사와 명절, 생일 음식이 각각 달랐다. 명절에는 특별한 요리가 더해졌다. 여러 종류의 전통한과를 한 달 전부터 준비해서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메밀은 껍질을 방앗간에서 타오고 콩은 직접 갈아 체에 걸러 두부와 묵도 직접 만들었다.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는 엄마였지만 모든 고기 요리를 뚝딱뚝딱 해냈다. 아들을 결혼시킬 때에는 사돈에게 보내는 이바지 음식도 직접 만들었다. 어린 내게 그런 엄마는 마술사였고, 어떤 음식이든 다 할 줄 아는 황금 손을 가진 존재였다.    


오빠들이 결혼하고 새 식구가 들어왔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지만, 명절이면 늘어난 새 식구에 손님까지 여전히 우리 집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쯤 나는 엄마의 부엌 살림살이가 초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올케들에게 그 민낯을 보여야 하는 것도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요리를 잘하는 엄마에게 예쁜 그릇을 선물해주고도 싶었다. 엄마가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직장에 다니며 상여금을 받았던 날이었다. 코아백화점 앞에서 세일이라며 홍보하고 있는 ‘한국도자기’에 시선이 꼬치고 말았다. 나는 당연히 엄마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30만 원을 결제하고 집으로 배달을 요청했다. 당시로써는 제법 큰돈을 주고 구입한 것이었다. 일주일 후 그릇이 집으로 배달되었고, 나는 그날 저녁 엄마에게 엄청나게 혼쭐이 났다. 그리고 엄마는 그 그릇을 시집가서 쓰라며 곧바로 광 안에 그대로 고이 모셔두었다.     


엄마는 부엌살림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아껴 썼고 쉽게 버리지 못했다. 가난해서 힘들고 어려웠던 삶의 경험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타고난 검소함이었는지 엄마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엄마의 부엌, 빛바랜 나무 찬장에는 오래된 양념 통이 하나 있었다. 

족히 20년쯤은 사용했을 법한 그 양념 통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엄마의 부엌 찬장에 참기름, 간장, 고춧가루 등을 넣어두던 찬장 칸에 다른 양념들과 나란히 있었다.     


부엌이 입식으로 바뀌고, 엄마의 부엌에서 내가 요리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나는 그 꼬질꼬질 노랗게 때가 끼고 아무리 씻어도 모양이 나지 않는 양념 통을 버리고 새것으로 언젠가는 바꿔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독립도 하지 않고 엄마 곁에 가장 오래 살게 되면서, 부엌을 정리하거나 청소하면서 그리고 간혹 요리를 하다 그 양념 통을 마주할 때마다 그 마음은 더 간절해졌다.     


시골 살림살이는 치워도, 치워도 뭔가 치운 것 같지 않는 남루한 모양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부엌을 청소하다 다시 엄마의 그 양념 통을 마주했다. “앗! 정말 버려야겠다.” 싶어 두말도 하지 않고 버린 후 앙증맞고 깨끗한 새 양념 통을 마련해서 찬장에 넣어 두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났을까? 싱크대 안에 버렸던 엄마의 양념 통이 떡하니 다시 놓여 있었다. 

“아! 뭐야” 

나는 엄마에게 따지듯이 주워왔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도리어 아직 쓸 만한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버린다고 핀잔만 들었다. 그 이후에도 엄마의 양념 통은 한 번 더 내 손에 버려졌고, 어김없이 다시 엄마의 부엌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부엌이 생겼다. 

그녀는 자신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든다. 

집을 짓고 새로 맞춘 싱크대, 조리도구, 그릇까지 그녀가 선택하고 구입한 것들이다. 

그녀는 여전히 엄마와 둘이 살고 있지만, 엄마는 그녀의 부엌에서 요리를 하지 못한다. 

하지만 기억 저편에 엄마는 여전히 엄마의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 

자식을 위해 가족들을 위해....

까만 솥 안에 하얀 쌀을 안치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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