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가진 섬 제주
우리는 제주도에 대하여 잘 모른다.
제주도에 대하여 항상 떠오르는 것은 여행을 가기 좋은 곳 감귤을 생산하는 곳으로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제주는 아픔이 많은 섬이기도 하다.
제주는 14세기까지 탐라국으로 고려시대 복속이 되면서 조선시대에 정말 병합되었다.
그렇게 제주는 우리의 삼국 통일 역사 속에서 뒤늦게 합류한 막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제주의 선박 기술자들은 여수 등에서 배 만드는 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우리가 임진왜란으로 침략당하고 있을 때 탐라의 후손들과 이순신 장군은 거북선으로 이 땅을 지켜냈다.
그뿐인가 여수지역의 선박 기술은 우리나라를 세계적인 조선강국으로 만드는 전통이 되었다.
우리 근세사에서 제주는 또 다른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 침략 시기 전국 어디나 피해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제주도 역시 일본 군사기지로서 활용되다 보니 다른 곳보다 유난히 많은 고통을 받은 지역이기도 하다.
일본군 해군부대가 주둔하던 제주도
그러나 제주에서도 가장 큰 아픔은 해방 후 조국에서 일어났다.
해방 후 남과 북이 나누어지고 이승만에 의한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발 한 지역이 제주이기도 하다.
이로 인한 이승만 정권의 보복성 학살이 있었고 우리가 이야기하는 제주 4.3이라는 하는 항쟁이기도 하고 학살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다행히 최근 제주 4.3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노력이 커지고 있다.
얼마 전 석학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제주 4·3을 말하다’ 특강에서 제주 4.3의 의미에 대해 “해방 이후 시대적 상황부터 차근차근 살피며, 이념의 문제로만 4.3을 해석하는 시각을 경계한다”며 “제주도민들은 해방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세력이 득세한 부조리에 항거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도올은 “4.3이라는 거 자체가 4.3의 본질이 아니다”며 “당하다 당하다 못 참겠으니까 일어난 것일 뿐인데, 그걸 담당한 세력이 남로당과 관련이 있다 한들 제주 인민들이 남로당과 무슨 관련이 있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도올 선생은 “4.3은 자치를 실현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미군정의 탄압이기도 했다”며, “제주 바깥에서 심각성을 인지하고 학살에 반발했던 여순사건까지 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도올 선생은 “단순한 민중 항쟁뿐만이 아니라 여기는 아주 형편없는 무지막지한 국가권력의 학살이라고 하는 테마가 들어가 있다”며 “거기에 대해서 정의로운 의거라고 하는, 학살과 의거라는 테마가 반드시 같이 반영이 돼야 한다"라고 했다. 한편, 도올은 4.3에 대한 정명이 아직도 없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며 조심스럽게 여러 사람들이 사용했던 ‘4.3 민중항쟁‘이 알맞다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제주에 여행을 하는 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곳은 제주 43 평화공원이다. 제주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는 학살의 역사를 반성해야 하는 것은 학살이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제주 4.3 학살은 보도연맹 학살로 이어졌고, 전쟁이 끝난 후 베트남에서의 학살로 이어졌고, 광주에서의 민중 학살로 이어졌다.
제주 성 프란세스코 성당에서 문정현 신부님을 만날 수 있다. 제주와 베트남 광주에서의 학살을 담은 시 베트남 피에타상 마지막 자장가
르완다 제노사이드
한국 역사 속 학살의 역사와 유사한 역사성이 있는 학살로 르완다의 학살이 있다.
식민지 제국주의 시대 벨기에가 르완다를 식민지로 만들면서 얼굴 형태로 후투족과 투시족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투시족을 지배계급으로 만들면서 관리하다가 식민지가 해방되고 나면서 벨기에로부터 인의적으로 만든 두종족이 서로 학살을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던 사건이 있다.
사실 르완다에서 그 학살을 실감하게 된 것은 그곳 정치인중 나이가 많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학살에 휘말려있었다는 것이었다.
이웃이 이웃을 학살하는 일들이 발생했고 그들은 그 학살을 한 범인을 마을에서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르완다에서는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으로든 죄를 물어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많은 학살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죄를 물게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그들은 마을 재판을 했다. 마을 사람들이 학살을 한 사람에 대해 재판을 했고, 몇 년 동안 마을 일을 하도록 하며 죗값을 어떤 형태로든 받게 했다.
그리고, 제노사이드 뮤지엄이라는 곳을 만들고 학살에 대하여 국가적 추모를 한다. 영화 중 "4월 어느 날"(Sometimes in April)이라는 영화는 그 사건을 그린 영화이다.
다시 제주의 학살을 그린 영화를 생각해보면 "지슬"이라는 영화가 있다.
한국과 르완다에서 제노사이드를 대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다면 우리의 경우 그동안 학살을 숨기는데 급급하다 보니 제대로 조명이 되지 못하고, 여전히 그 피해자 가족들은 만족할만한 매듭을 보지 못한 점이다.
그러다 보니 관련된 출판물도 차이가 많다. 우리가 아프리카 작은 나라라고 하는 르완다의 경우 학살에 대한 트라우마를 줄이기 위해 많은 책과 관련 영화 등 다양한 과정은 상처를 들어내 놓고 보려는 것 같았다.
르완다 제노사이드에 대한 영화 포스터
다만 그들 사회에서 절대적 금지어가 있다. 서로가 후투족, 투시족이라는 서로를 분리하는 용어를 금기시하고 있다. 우리로 말하자면 빨갱이 같은 용어를 금지한다. 우리에게서는 오랜 세월 빨갱이라는 이유로, 빨갱이로 몰려서 죽음을 당해야 했던 아픔이 있다. 독립운동을 하고도 빨갱이로 몰려 죽음을 당한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가 작은 아프리카 나라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상처를 이해하기 위해 치료하기 위해 죄를 처벌하고, 역사적인 이해를 해야 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그런 갈등의 원인이 되었던 차별적 언어를 쓰지 않는 것이고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의 상처가 속으로 썩기 시작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상처를 드러내 놓고 치료해야 한다.
역사 속 아픔에 대하여도 속으로 썩지 않도록 숨겨진 진실을 끄집어내어 함께 공존하기 위한 가치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리고 학살의 주역들에 대하여 역사 속에서라도 죗값에 대하여 치를 수 있도록 기록하고 피해자들에 대해 위로가 필요하다.
2019년 휴가 중 제주에서
이 글은 양천지역신문 뉴스 Y 6호에 게재한 글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비극적인 학살이 있어왔습니다.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그리고 르완다에서의 학살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우리의 경우 해방 후 친일 경찰과 군인들에 의한 제주 4.3 및 보도연맹 학살이 있었고 친일 군부세력은 베트남에서의 학살을 했고, 그들은 광주에서의 학살을 이어왔습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학살에 대하여 깊은 반성과 피해자에 대한 깊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학살의 역사 기록을 남겨놓아야 더 이상 다른 학살로 이어지는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