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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Aug 23. 2020

전문가 허상과 대안 시민

밑천 드러나는 교육권력과 시민사회 집단지성

전문가 허상 미네르바 사건


한국사회에서 전문가의 허상이 드러난 사건으로 미네르바 사건이 있다.

미네르바라는 별명으로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 경제 방에서 활동하던 인터넷 논객이다.


사람들은 2008년 하반기 리먼 브라더스의 부실과 환율 폭등 등, 대한민국 경제의 변동 추이를 정확히 예측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분명 유명 증권 전문가 혹은 투자자일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는 유명 증권 전문가도 아니고 투자자도 아닌 일반 경제와 주식 등에 관심 있던 개인이었다.


그는  2009년 허위사실을 유포한 혐의로 검찰에 체포 및 구속되었고 언론에서는 그가 전문대 출신이니 하면서 인신공격을 하며 기득권 전문가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한듯했다. 검찰의 무리한 기소와 언론의 여론재판으로 구속상태에서 수사를 받다가 2009년 4월 1심 판결에서 무혐의로 무죄 선고받고 풀려났다.

미네르바 박대성 씨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한국사회는 충격에 휩싸였고 그전까지는 대중들이 느끼던 전문가의 자격에 대해 일종의 환상이 깨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네르바 사건은 일반인들도 분야별 통찰을 가지면 금융전문가보다 더 뛰어난 분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된 사건이었다. 결국 통찰력 있는 대중들에게 정보통신 발전은 전문가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되었고, 기존 전문가에 대한 의심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알게 된 것은 검찰의 무리한 기소 및 언론의 여론 재판을 통해 그 당시 기득권 세력들은 대중들이 그들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경계하고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밑천 드러나는 교육권력과 전문가 집단


사실 기존 언론은 전체주의 시대 산업화 인력과 관리인력을 육성하는 수단이었다.

우리는 매체가 만들어주는 전문가 전성시대 살고 있지만 사람들은 미디어의 영향력에 따라 그들에게 전문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다보니 부분적인 정보의 신뢰성으로 본질을 호도하기도  한다. 이들은 본질적 전문성보다는 미디어 권력기반 홍보를 통해 돈을 벌어들이는 기존 조선, 동아와 같은 언론 매체 중심의 전문가 집단으로 형성된다.


미디어는 대중에 대한 발언권을 통해 수많은 전문가를 양성한다. 그러나 미디어가 만든 전문가는 전문성을 표현하는 이력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본질보다는 언론이 요구하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력이 없더라도 약간의 말발과 학위, 그리고 인맥과 미디어의 뒷받침만 있으면 누구나 전문가로 탄생할 수 있다.


우리가 전문가로 불리는 사람들은 소위 학벌을 가지고 교수 타이틀을 가지고 있거나 책 몇 권을 써서 스스로를 포장하는 사람들이다.  특히 빠르게 변화되는 시대지만 과거의 이력으로 평생 우려먹는 경우도 많다.

특히, 한국사회 전문가들은 전체주의 독재정권의 검열을 통과한 사람들로서 TV 나 라디오와 같은 매체를 독점함으로써 그들은 능력과 달리 누구도 범적 못할 전문가로 마시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최근과 같은 민주화 시대에는 미디어 노출을 원하는 자칭 전문가들은 종편과 같은 미디어 매체가 원하는 말을 전문적으로 해주고 명성을 얻는 만물박사 전문가들이 탄생하게 된다.


그들뿐 아니라 대학교수와 같은 집단 역시 본질적 연구보다는 미디어 노출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최근 코로나 19로 대학교육은 온라인 교육방식이 필수가 되면서 온라인 강의를 해야 하는 입장에서 적응이 어려운 교수들이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는 강의 품질 측면에서 대학교수의 강의와 기존 유튜브 강의 중 어는 것이 우세한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사실 대학교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유튜버를 넘어서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이야기까지 나온다. 특히, 온라인 교육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유튜브와 경쟁을 통해 더 좋은 강의를 하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가지기도 한다.


그런데 근본적인 한국 교육문제는 그들 교수집단과 사학이 가지고 있는 교육철학 관점과 태생적 낙후성에 있다.  한국사회는 대부분 고등교육은 사립교육재단이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그러나 그런 사학들의 경우 친일 기반 기득권 전통이 있다 보니 현재 까지도 일부 대학교에서 일본 침략역사를 미화하고 일본군 위안 부문 제등에 대하여 일본 극우집단의 논리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은 일본 전범 단체인 사사가와 재단 지원을 받기도 한다.


안익태는 만주 환상곡, 애국가를 만든  친일, 친 나치 음악가로서 활동했고 한국 지식사회 친일 뿌리는 깊다.


한국사회는 현재는 소위 이승만을 국부로 보는 친일 기반의 정당으로 대표되던 정치세력이 한국사회에서 가장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되어 오면서 관련된 지식 카르텔을 공고하게 형성해 왔다.

이들은 사법계와 교육계, 의료계, 산업계에 특히 많이 포진되어 있다. 모두 안정적으로 부를 유지할 수 있는 상위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뉴스타파 친일과 망각, 2015)


이들은 계속 근대사를 축소하며 자신들을 숨기고 면피하려고 해왔다. 거기에 더하여 뉴라이트 역사관은 식민지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다고 하는 일본 입장의 역사관을 우리 아이들에게 주입시키려고 해왔다.

군사독재정권 시절 학생인 우리 세대 역시 어릴 적부터 배워온 안보교육 속 북한에 대한 비판을 하는 모습은 현재  보수종편과 동일하다. 심지어 역사교과서에는 동학군에 대한 토벌과 동학의 난이라고 배워 오는 등 일본 입장에서 기술된 역사책으로 배워왔다.


문제는 세상이 변한 것처럼 교육은 변하지 않았고 여전히 한국의 교육시스템은 본질적 사회문제 해결보다는 기득권 전문가 양성에만 관심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일반 대중들이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면서 전문가 및 한국 교육의 허상을 보게 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평가로 얻어진 교육권력


한국사회 학교 교육은 사회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그러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의 교육과 시험에 몰두하다 보니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 것이 완성된 것으로 생각해왔다.  우리는 흔히 평가라는 틀에 적응하면서 청소년기를 보내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본질적으로 교육에 대하여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친다라고 하지만 누군가를 평가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일 수 있다. 수능이던 어떤 시험으로든 혹은 기업에서 KPI 등으로 인간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것은 거짓이고 환상일 수 있다. 단지 특정 잣대로 줄 세우는 평가를 통해 한정된 기회를 분배하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항상 교육 기득권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교육을 통한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해서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또한 평가에 순응하고 길들여지다 보면 대중은 교육을 통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계층을 인정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울 유명 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은 지방대학교 학생들에 대하여 지잡대 출신이라고 무시하기도 한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과잠(과 잠바)을 만들기도 한다.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학생들은 스스로 계급적 우위를 느끼곤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에는 교육은 앞칸의 권력 계급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제는 사학 등 과거의 교육권력과 언론은 이러한 평가를 통해 얻어진 권력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들 교육권력과 언론으로 탄생한 지식권력들에 의한 지구환경파괴와 노동 악화 삶의 피폐화 등 여러 가지 폐해를 겪어왔던 사례를 보았듯 앞으로 미래사회 변화를 위한 주축이 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대안으로서의 교육과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기존과 다른 지식계층이 필요해졌다.

어떤 면에서 지식계층을 대체하는 시민들의 각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다.





중요해진 시민사회 집단지성


인간의 두뇌는 다양한 신경세포의 연합과 연결이 두뇌를 형성한다. 두뇌는 수많은 신경세포 뉴런과 이를 연결하는 수많은 시냅스 연결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경험이 축적이 된다. 이러한 원리를 모방하여 만든 것이 인공신경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인공적으로 유사 지능을 기술적으로 구현하면서 사람들은 경험과 기억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를 확장하면 우리 사회도 일종의 인공신경망처럼 개개인이 뉴런 세포와 같은 역할을 하며 많은 소통을 통해 사회가 집단학습을 하는 과정에 놓여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 있다.


결국 우리에게는 집단지성이라고 불리어지는 시민의식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역사적 사건들을 시민들이 학습하여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인공신경망을 이루는 것처럼 활동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실제로 한국사회는 수많은 불행과 영광의 시대를 거치면서 수많은 국민들 개개인들이 각성하면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쳐왔다.


결국 우리 시민사회는 특정 전문가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사회 전체 경험과 각자 자신들의 체화된 경험을 연결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통해서 인류가 처한 어려운 문제 해결을 위한 집단적인 각성이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한국사회는 집단적인 각성을 해오는 과정이 최근 몇 년 동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집단적 각성은 민주화에 대한 움직임, 그리고 독재에 대한 항거, 부정한 정권 퇴출과 사법, 언론 개혁, 역사청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100년 전부터 진행되어온 의식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뿐 아니라 과거 산업혁명을 이루었던 영국, 유럽 등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어왔다.

당시 유럽 사회는 17세기 카페 문화가 발전되면서 정치적, 사회문화적 변화가 많아졌다. 즉 사람들이 모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사회적인 변화가 활성화되었다. 이로 인한 기술의 발전은 사회발전과 경제, 정치, 환경에 영향을 미치면서 이들은 서로 영향을 주면서 변화하게 된 것이 오늘날 현대사회가 이루어진 과정이다.


오늘날 세계질서를 이루게 한 서구의 산업혁명의 배경을 보면 과거에 머무르지 않던 지식 집단이 있었다.

과거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태동하게 된 배경에는 신분과 상관없이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는 루나 소사이어티라는 커뮤니티가 있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하면서 혁신이 태동하게 되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찰스 다윈의 진화론 등이 이 모임에서 나왔다.

늦게 귀가하기 위해 보름달이 뜬날 만남을 가지는 루나 소사이어티의 만남 모습


여기서 엘리트 중심의 한국사회에서 생각해 볼 부분은 과거 혁신이 이루어지던 유럽 사회 환경을 볼 필요가 있다. 유럽 사회에서도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분이 상관없는 다양한 계층 간 소통 속에 혁신이 나왔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바라는 혁신을 하기 위해서 계급화한 학교를 중심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역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어느 시대나 진보가 있어왔지만 우리에게 진보적 변화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의 생존과도 연관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더 이상 특정계층을 중심으로 하는 엘리트주의로는 혁신을 할 수 없다.

변화하는 지구 환경에 대하여 기술적으로 제도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줄어드는 일자리에 대하여 사람들과 협의를 하면서도 새로운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을 기반으로 세상을 바꾸면서도 부익부 빈익빈 사회가 아닌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야 하고 기술발전으로 줄어드는 일자리는 비록 인간의 노동을 줄이더라도 풍요로운 삶의 얻을 기회를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제 인류는 원하던 원치 않던 변화 해야만 하는 환경에 놓였다. 그동안 변화가 되지 않던 교육환경도 온라인 교육, 가상현실 교육으로 변화될 상황에 놓였다. 여기에 온라인 교육이 확산되면 기존 학교의 틀을 유지하는 교육은 무의미할 수 있다.

오히려 마을단위 작은 소모임과 방송국 등 이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대학교의 혁신을 넘어서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 특히, 마을단위 작은 영세 사업자들이 연결하여 그들이 필요로 하는 산업을 확장하는 방식이 된다면 혁신이 더욱 빨라질 수 있다.


그러나 기존 대학의 변화도 필요하다. 실질적인 대안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국립대 네트워크 통폐합과 함께 디지털 정보의 특성상 과거와 같은 공간의 이점을 가진 대학보다는 무한정 확대 강의가 가능한 온라인 대학의 필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인다.

온라인이 되면 과거와 달리 정원이라는 개념도 필요가 없다. 정원을 얼마로 하는 것은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이 있을 때 이야기지만 물리적 공간이 통폐합되거나 사라진 대학에서는 정원을 무한대로 늘려도 좋다.


비록 낮선변화의 길이지만 인류는 그동안 도전하지 않던 영역으로 길을 떠나야 하는 유목민처럼 과거 유물에 대한 정리를 하고,  몸을 가볍게 하여 새로운 상상력으로 변화 여정을 준비해야 한다. 그 길에 한국사회가 뒤처지지 않고 길을 개척해 가기 위한 도전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현재의 한국사회와 미래세대를 위해서도 과거 관념에 사로 잡힌 전문가들의 허상을 깨트려야 할 시점이다.

특히 기존 계급화된 엘리트 의식을 버리고 새로운 연결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나의 대안으로써 시민사회 커뮤니티는 환경, 노동, 및 경제 등을 배울 수 있는 터전이 될 수 있다.

과거부터 도시는 사람들이 모이고 커뮤니티가 형성되면서 새로운 혁신, 새로운 사상 등 다양한 진보와 혁신적 활동의 중심이었다. 이제는 오프라인을 너머 온라인의 영역으로 도시 공간을 넓히면서 새로운 정보통신기술이 적용된 교육 방식으로 기후위기 및 코로나 19 이후의 대안사회를 위한 혁신을 준비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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