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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Mar 11. 2022

시대정신(Zeitgeist)

시대정신 정의와 한국사회 시대정신의 주체

시대정신이란


우리 시대를 특정 짓는 시대정신(독일어 표현"Zeitgeist"과 영어식 표현 "spirit of the age, spirit of the time")이란 용어는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걸쳐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헤러더가 제시한 민족정신 개념으로 시작했다.


그는 인류사를 인간 정신 완성으로 향하는 보편적 역사로 파악하여 주장했고 실제 우리의 역사 또한 조금씩 서구와 동양의 정신들이 결합되고 부정되면서 어떤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대정신은 한 시대에 지배적인 지적·정치적·사회적인 정신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시대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 통일열망과 같은 사회적 상식을 가리켜 '시대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생각하는 사회적 상식이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 두려운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일제 강점기의 일반 대중들의 마음속에 친일파들에게 분노했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완용처럼 나라 팔아서 일제에 잘 보여 먹고살기 위해 부역하는 것을 선택한 다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일반적으로 삶의 방식인 강자에 숙이는 것을 시대정신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본능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와 관련으로 역사학자인 전우용 교수가 학생 시절 겪은 이야기에서 시대정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전우용 교수 역시 군사독재 시대에 벌어진 폭압정치를 보면서 부채감을 가진 80년대 서울대 대학생 시절 자신의 특권을 자기 권리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부채감을 가지게 되는 가에 따라 다른 삶의 선택들 하게 된다고 한다.


대학 들어가서 낭만을 즐기려던 평범한 신입 대학생이었던 전우용에게 의문과 충격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교수와 동료 대학생도 학내에서 공안경찰에게 잡혀가고, 5.18을 알리기 위해 자살한 경제학교 4학년 김태훈 대학교 선배 죽음은 신입 대학생 전우용에게 의문을 가지게 했고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들을 본받으려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지만, 그는 평상시 대학생 친구가 있었으면 했다고 한다. 노동자 전태일이 가진 문제의식을 함께 할 지식인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를 뒤늦게 알고 각성한 서울대를 졸업한 조용래 변호사는 노동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그 시절 대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버린 사람들을 보면서 사회와 스스로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생 청년 전우용도 같은 대학교에서 죽은 사람의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고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일 때 시대정신이 형성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안중근 의사와 같이 분연히 일어나서 싸우거나, 3.1 혁명에서 태극기를 들고 나서는 것은 분명 시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안중근과 이완용의 삶에 대해서 그시대 대부분은 사람들은 안중근의 삶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죽은 안중근의 생각이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시대정신은 한 시대 많은 사람들의 꿈이 아닌 본받으려는 마음이다. 생존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 본받으려는 마음이 모인 것이 시대정신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오히려 이완용처럼 이기적으로 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대정신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안중근의 삶의 경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시대정신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대정신은 한 시대 많은 사람이 가진 꿈이 아닌 본받으려는 마음, 응원하려는 마음이라고 전우용 교수는 정의했다.



만들어진 분노와 선전선동


시대정신과 혼동하기 쉬운 것이 선전선동 갈라치기다.

선전선동 갈라치기는 의도를 숨기고 있으며 전파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본질적인 목적은 지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지배 국가를 식민지를 지배할 때 이러한 방법을 사용해 왔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현대 정치에서 기득권 권력이 대중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흔히 들 나누고 지배한다.(divide and rule, divide and conquer)로 이야기하는 분할하고 지배방식은

대중들이 통합될 때 나타나는 강한 저항력을 상쇄시키기 위해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나눠 지배하기(Divide and Rule) 전략을 위해서는 주로 사용하는 갈등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다.

원칙적으로는 언론인과 정치인들이 갈등 해소와 통합해야 하지만 우리가 인식하건 인식하지 못하건 오히려 그들은 갈등을 만들고 조장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만들어진 갈등이 적용된 사례를 보면 남녀 갈등, 외국인, 지역감정, 이념갈등을 강조하면서 갈등을 통한 선전선동과 지지층 결집을 위해 활용된다.


갈등을 만드는 구조에서 이익을 보는 세력은 선전선동을 통해 강력한 지지자 그룹을 만들어 낸다. 오늘날 일베 사이트 및 워마드 사이트가 대표적인 사례 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취업이 어렵고 사회 속에서 기회를 잃고 소외된 젊은 층은 자칫 더욱 현혹되기 쉽다. 그들 잘못이 아니지만 기득권은 안 보이게 그들을 현혹하여 괴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과거 역사 속에서 히틀러의 청년 근위대인 히틀러유켄트(Hitlerjugend)를 조직한 것 과 유사하다.  당시 히틀러 청년단원이 공산당에 희생된 것을 부각해 많은 청년들의 분노를 통해 히틀러유켄트를 확대했다. 한국사회도 보수교회 청년들을 모아 조직한 서북청년단이 잔혹한 짓을 하게 했다. 종교와 이념은 이성을 차단하여 광기 속으로 청년들을 몰아가서 그들 스스로를 비극적인 구조속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 밖에도 역사 속에는 유사한 사례가 많다.  중국 홍위병, 그리고 아프리카에서 마약으로 이성이 마비된 소년들에게 총을 들고 싸우게 하는 등 권력은 교묘하게 사회 속에서 완전히 자아를 형성하지 못하게 한 아이들에게 참혹한 짓을 하도록 강요해왔다. 


오늘날 많은 20~30대 남성 청년들의 경우 대중매체와 온라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준 남녀 갈등 프레임에 의해 모든 자신들의 불만의 원인이 동년배 여성으로 인한 것으로 착각하고 분노하며 정치화되고 있다.

정작 그들 분노의 기본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정치적으로 이용된지도 모르고 도구화된 20~30대 남성들 역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상위의 설계자들은 여자들에게도 워마드와 같이 갈등을 부축이면서 페미니즘을 왜곡시켜왔다.

따라서 남자와 여자들의 분노는 시대정신이 아닌 의도에 의한 갈라 치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0~30대 남과 여 모두 시대의 피해자들인데 왜 서로를 반목하게 하는가?


그런데, 왜 이렇게 남녀 갈등이 커진 것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사실 그 원인은 정치적으로 갈등 요소였던 이념갈등이 퇴색하고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동서 지역갈등에 대한 의도적 설계였지만 이러한 부분도 노무현과 같은 정치인의 등장으로 점점 퇴색해 가고 있기에 새로운 갈등 주제가 필요했다. 

그러한 주제 중에서는 외국인 갈등이 있었다. 향후에는 종교 갈등도 이러한 갈등 주제로 사용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갈등요인을 증폭시키는 일은 대중들을 나누고 통치하며 기득권의 이익을 최대화 하기 위한 핵심요소다.


문제는 한국사회 지식인 집단 언론인들은 대부분 기득권 권력과 자본을 위해 종사하다 보니 갈등의 골을 깊이 만드는데 주력한다. 그들이 선전 선동하는 방식을 보면 주로 본질을 왜곡하는 방식을 사용하며 본질이 아닌 곁가지를 강조하면서 본질을 왜곡하는 방식으로 선전 선동한다.


예를 들어 청년 취업문제가 그렇다. 청년들에게 기회가 부족한 본질을 외면한 체 남녀 취업 시 가점 문제, 비정규직을 정규직 전환하는 경우에 대한 불만들을 통해 선전 선동한다.

문제의 본질로 들어간다면 일자리 부족원인, 그리고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구조와 정책이 중요한데 언론들의 문제 이 부분을 외면하고 을과 을의 갈등으로 이끌어 가도록 프레임을 왜곡한다.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기성세대의 정치적 경험을 수용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로 짧은 메시지와 이미지에 길들여진 소셜미디어 문화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들에게 인문학 책보다는 짧고 감각적인 소셜미디어가 쉼터이고 그들의 소양이 만들어지는 공간이지만 결국 이들은 이미지만 소비하고 본질을 놓쳐버리는 경우가 많아진다. 사실 진실은 깊은 통찰에서 비롯되지만 이들에게는 인문학을 소비할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들에게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보다는 어른들은 입시를 위해 경쟁교육으로 아이들의 공부 목적이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문제 풀고 좋은 대학 가는 목적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극도의 경쟁학습은 공동체가 아닌 개인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었다.


젊은 세대가 이러한 갈라치기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세력에 이용당하지 말고 세대의 경험이 이어지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엘리트 계층의 각성과 변질


과거 70~80년대 학생운동이 많았던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 광장은 학생시위가 빈번했던 1970, 80년대 대학 캠퍼스 중심부 보행로를 보도블록 대신 콘크리트로 포장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시위가 벌어지는 날이면 보도블록을 깨뜨려 ‘짱돌’을 만들고 시위를 진압하려는 전투경찰 대치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어른들은 공부 잘해서 서울대뿐 아니라 명문대에 들어간 대학생들이 공부는 안 하고 맨날 시위질이냐고  학생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그 시절 대학생들이 그럴 수 있던 것은 전태일 같이 배울 기회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보다 더 큰 각성을 통해 스스로 부끄러움을 가졌고 성찰했던 결과이기도 했다. 또한 배움과 다른 현실의 불합치에 대한 분노와 문제 인식도 있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면 대학교육으로 자신들이 가진 혜택에 비해 나머지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는 대부분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의식이 있었다. 


반면 현재의 학생들은 부모세대의 정의감보다는 이명박 정권 시절 경쟁위주의 및 철저히 계급화하는 방식의 교육정책 재편으로 경쟁교육에 길들여 살아왔다. 그러나 그런 경쟁 교육의 마지막 종착지인 졸업 후 삶은 공허했다. 세상에 대해 점점 많은 좌절과 분노만 쌓인 채 좌절감을 강요받는 세대가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서울대와 같은 명문대 역시 다르지 않다. 그러다 보니, 최근 서울대 출신의 관료들의 비리 및 각종 관료집단과 기업인으로서 독점적이지만 그들의 모습은 몹시 타락한 모습일 뿐이다. 

그들이 벌이 수준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그것이 아닌 무한한 탐욕의 경쟁 속에 놓인 살아온 대로 욕구를 통제 못하는 것이다.


현재의 명문대 재학생들의 모습 역시 과거 부채감을 가진 선배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그들이 경쟁을 통해 얻은 성취는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얻었다고 생각하기에 앞으로 얻게 될 권력은 자신을 위해 씌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철학 없는 엘리트층으로 성장하며 실력을 키우기보다는 권위를 강화시키기 위해 그들은 서열화를 추구하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도전을 막아내기에는 서열화와 권위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면서 교수사회 및 엘리트 관료 사회, 언론계, 기업 등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실력은 없지만 꽤 오랫동안 좋은 자리를 지킬 수 있다.


독점적으로 얻게 되는 사회적 권한이 사회 속에서 어떻게 씌어야 하는지 관심이 없고 그 권한이 오직 자신을 위한 사적 권한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국내 레거시 미디어의 기자 역시 상당한 학벌을 가진 권력에 속한다. 언론은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움직이는 사기업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선전 선동하며 대중들을 갈등과 불만을 높이는 이유는 누군가의 정치적 목적에 의한 의도적 갈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엘리트 권력은 파시즘화 되었다.


한국사회 예비 지식인들은 지식인으로서의 문제의식보다는 자신이 속한 기득권이 만들어 주는 프레임을 따라가는 정도로만 보인다. 몇 년 전 서울 재학생들의 인식을 통해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으로 검찰총장 출신 대권후보, 현재는 대통령으로 선출된 윤석열을 꼽았다. 

반면 과거 서울대인들은 부끄러운 서울대 1만 인 성명도 있었다. 이들은 과거 부채감을 가졌던 70~80년대의 서울대인으로 현재의 서울대 학생과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누가 조금 더 많이 갖는가 정도에 따라서도 좌절을 느끼도록 경쟁하는 시대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무한한 탐욕으로 치닫는 사회를 우리는 지옥이라고 한다.


이러한 경쟁 사회로 인해 빈부격차는 가속화되고 가진 자에게만 집중되는 기회 등 우리 시대는 철저하게 불공정하다.  안타까운 것은 적은 기회에 젊은 층들에게 왜곡된 능력주의가 공정으로 착각하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특히, 마이클 센델 교수님이 강조하는 내용 중 우리가 능력이라고 믿고 있는 학벌 및 지위 등 가치가 자신이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에 의미가 크다. 심지어 대학에 대해 추첨제로 하여 서울대등에 입학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서울대에 들어간 사람들은 자신이 잘나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 시대 소위 스스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가지는 승자독식 관념을 벗어나게 하기 위해 그들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비록 시작은 전태일과 같은 노동자로 시작되었지만 과거 시대정신을 이어가는 주체는 학생운동을 주도해온 엘리트 계층으로 진입이 가능한 대학생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현재 엘리트 계층으로 편입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시민으로 남아 일하는 대중들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울대 등 상위권 대학 졸업생들은 사회 주요 요직을 맡게 되면서 스스로 특권층으로 결집하게 되었고, 학생들마저 예비 특권층으로서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들 대학에 입학하는 과정이 특목고라는 특권적 중간단계 교육체계를 거쳐 입학하기에 일찍부터 특권의식이 내재되어 나타난 현상일 수 있다. 


반면 정보기술의 발전은 정보격차를 줄여서 새로운 계층을 만들었다. 

그들은 사회 속에서 경제활동을 하는 계층으로 소위 노동자 계층이도하고 자영업자 중산층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들을 학벌로 특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들은 과거와 달리 바쁜 생활 속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되기도 하며 집단지성으로 지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우리는 이들을 깨어있는 시민이라고 한다. 이들은 변화하는 기술과 문화를 가장 빠르게 접하고 세계 속에서 일하며 세상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이들은 새로운 형태의 지식계층으로 기존 기득권 엘리트 계층과 달리 현실적이고 사회경험을 통한 집단지성으로 기존 엘리트 계층의 견해를 넘어설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증거로서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전통적 언론에 대한 불신이 높아졌다는 것이 그 증거이기도 하다.


사실 언론은 과거부터 왜곡되었지만 대중들이 알아차린 것은 비교적 최근이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계층에 의한 시대정신이 이끌어지는 시대가 정보 기술의 발전과 함께 이미 진행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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