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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Jul 31. 2022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스탄불까지

결핍이 만들어낸 대항해시대와  서구사회 르네상스를 촉발하게 된 배경

이글의 초안은 이스탄불 탁심광장 모스크에 있는 찻집에 앉아서 오스만 커피를 마시며 초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후 하나씩 내 생각을 추가하고 정리하며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세상 속 모든 국가의 흥망성쇠에는 공식이 있는 것 같다.

과거 로마제국의 전통을 이어온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문명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이유를 보면 그 당시 서구사회보다 우세한 이슬람 문명을 보게 된다. 그 당시 종교 중심의 종교적 야만이 지배하는 유럽 사회에 비해 이슬람 문명은 보다 개방적이었고 보다 경쟁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서구사회 중심의 세상이 된 배경에는 과거 서구사회가 이슬람 문명에 비해 취약했던 시기(암혹기)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류 문명의 힘은 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의 역량으로. 강압적인 사회가 아닌 스스로 주인 되는 구조 즉 민주적인 자발성에 따라 달라진다.


로마제국의 상징 같은 도시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은 과거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다. 콘스탄티노플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 그리스 식민지 비잔티움에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런 이유인지 과거 동로마 제국은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동쪽의 로마로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불려졌다.

  

콘스탄티노플은 고대 그리스,로마를 이어온 대제국으로 도시 곳곳에 그시대 영광을 알려 주는 유적이 많이 있다. 구시가 중심에 들어서니 커다란 당주 같은 유적이 있었다. 이 당주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콘스탄티누스의 기둥이라는 유적으로 로마에 있던 아폴로 신전으로부터 가져온 유물이다. 기둥 맨 위에는 아폴로 신이 아닌 콘스탄티누스 대제 상을 세웠던 기둥으로 이곳 콘스탄티노플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콘스탄티누스 기둥


특히, 콘스탄티노플 소피아 대성당 근처 히포드롬 광장에는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집트 파라오 투투 모스 3세 오벨리스크를 옮겨와서 설치해 놓았다. 또한 그 옆에는 현재는 보수공사 중이지만 청동으로 된 뱀 기둥 유적이 있다. 이 뱀 기둥 유적은 기원전 5세기 페르시아를 물리친 그리스인들의 전승기념비로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있던 뱀 기둥이 설치되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제도는 로마적이지만 그리스적인 문화로 성장한 도시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다양성이 기반이 되어 콘스탄티노플은 6세기 최고의 번영기를 맞이하게 된다.




동서양 물류 중계 도시 콘스탄티노플, 현대 이스탄불


서로마가 몰락한 이후에도 동로마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건재했던 배경은 무역의 중심지로서 경제적 윤택함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비잔티움 제국은 서아시아를 통합한 대제국으로 실크로드를 통한 동아시아와 연결되는 무역의 중심도시가 바로 콘스탄티노플로서 과거 육상 무역이 중심이던 과거부터 매우 윤택한 도시였고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전략요충지 일수밖에 없다.

동로마제국(보라색)과 서로마(적색) 제국. 출처=wikimedia

현재도 그 당시 부의 축적이 얼마나 대단한지 하기아 소피아 성당/모스크를 통해 알 수 있다.

거의 1,500년 전에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이 건물은 현재 아야 소피아 또는 하기아 소피아(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고대: 하기아 소피아, 현대: 아야 소피아[*], 라틴어: Sancta Sophia 상크타 소피아[*], 티르 키 예어: Ayasofya 아야 소프야 [*], ‘소피아 성녀’라는 뜻)의 정식 명칭은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로 불리어진다.


소피아 대성당은 과거 동로마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소피아 대성당은 537년에 1453년까지는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자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총본산으로. 이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1453년 5월 29일부터 1931년까지는 모스크로 사용되었고, 1935년에 박물관으로 다시 개장했다. 이후 2020년 7월 10일에 에르도안 대통령의 지시로 다시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바뀌었고, 현재는 '하기아 소피아 그랜드 모스크(The Hagia Sophia Grand Mosque)'로 사용되고 있다. <위키백과 참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박물관 시절 2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만 모스크로 바뀐 현재 2층에는 오르지 못하고 일부 큰 성화는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모스크의 특성상 카펫이 깔려 있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한다.


2022년 현재는 성소피아 박물관에서 현재는 모스크로 변화되었다.

성 소피아 성당 출구에는 과거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를 보여주는 벽화가 있다. 벽화중앙에 위치한 하나님 상징 오른쪽은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봉헌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있다면 왼쪽은 이곳 성소피아 성당을 기부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있다. 이곳 성소피아 성당은 기독교적인 벽화와 이슬람 모스크로 변화된 현재처럼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뒤섞여 있는 생소한 문화 현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왼쪽은 성소피아 성당을 기부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이고  오른쪽은 콘스탄티노플 도시를 봉헌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도시는 이질적 문화가 서로 교류하고 전파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런 이질적인 문화는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인적 교류를 통해서 전파된다. 특히 이슬람에서 발전된 과학기술, 학문, 전쟁기술 등이 유럽에 전파되었고 문화적인 변화도 있었다. 특히 이스탄불에서 시작된 커피 문화는 유럽 사회에 전파되면서 유럽인들의 문화도 변화시켰다.



인류 진화를 위한 역사 속 수많은 변화


내가 온 이곳 이스탄불은 마치 우리나라와 같이 지정학적 중심지인 곳이기도 하다.

대체로 지정학적 중심지는 중계무역을 통해 부를 모을 수도 있지만 전쟁시기에는 서로 약탈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과거 동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무역을 통해 부를 쌓았지만 같은 기독교 국가들이지만 무역의 견제대상이었던 베네치아 십자군에 의해 약탈을 당하기도 하고 끝내는 오스만 터키 왕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 의해 함락(1453년 5월 29일)되었다.

이로서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문화로 흡수되면서 중세시대 유럽 사회는 문화적인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을 잃고 이로서 과거 동서 무역 경로를 빼앗기게 된 유럽 사회는 새로운 무역 경로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결핍의 역사는 새로운 무역항로 개척 등 대항해 시대를 열게 되었고 이후 서구사회는 르네상스 등 변화가 이루어지며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탁심 힐 호텔에서 바라본 한강 폭 규모 바다로 마르마라 해가 보인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트루크에 의해 함락되는 과정을 보면 발전된 전쟁기술이 동원되었다.


탁심 힐 호텔 창밖에 보이는 마르마라 해 앞바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높은 성벽으로 이루어진 도시로서 방어 측면에서 유리한 도시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칼 라타 다리에 해당하는 곳에는 수중 철책이 있어 이슬람 배가 진입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를 현재의 이스탄불 아시아 대륙 북쪽에 언덕을 깎고 길을 만들어 배를 이동시켜 진격했다고 하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전투의 결과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유럽 사회 충격이었다.

지정학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은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도시로 모든 교역의 중심이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교역의 중심지는 잘 살고 문화가 발전되어 있다.


칼리타 다리 북측에서 유럽 측을 바라본 모습, 과거에는 수중 철책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요새로서 오스만 터키는 북쪽 반도로 배를 보내서 침공했다.
과거 콘스탄티노플 옛 지도


오스만 제국의 궁전인 돌마바흐체 궁전에 전시된 오르반 대포


또한, 전쟁무기로서 오르반(Orban) 또는 헝가리의 주물 기술자이자 엔지니어인 우르반(Urban; 헝가리어: Orbán, 1453년 사망)이 자신 이름을 따서 만든 거포로서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포위 공격에 투입,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큰 역할을 했다.

이처럼 앞선 과학기술은 세상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주역으로 역할을 한다. 이처럼 15세기경에는 유럽의 기술보다는 오히려 이슬람의 기술과 학문이 앞서 있었다. 이러한 배경은 이슬람의 밤문화와 함께  커피 문화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튀르키(구 터키) 국기를 보면 달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우리가 이야기하는 적십자사의 모습도 이스탄불에서는 빨간 십자가가 아닌 빨간 반달이다.  이들의 상징은 달이다. 달이 상징하는 것은 낮시간 활동이 어려워서 밤에 활동하는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지 모른다

이슬람 도시의 활기차고 밤 야경은 신비로워 보인다.

코로나 시기지만 이스탄불의 밤은 낮보다 화려하다. (2022년 5월)


이스탄불에서는 가계의 주인이 누군가에 따라 술을 마실수 있는 곳과 못 마시는 곳이 나눠져 있다.

따라서 술 문화와 커피 문화 물담배 등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카타르와 같은 곳에서는 술의 반입조차 불가능하다. 아마 전통적 이슬람 문화는 그러했을 것이라 짐작하게 한다.

카타르 전통시장(올드숙)에 가면 볼 수 있는 물 담대와 차를 하는 사람들 (2013년 10월)


특히, 이러한 이슬람 전통시장(올드숙)에 가보면 오늘날 노천카페 같은 형식의 카페들이 즐비하다. 사실 낮에 더운 기후적 특성으로 노천카페에 않아 있기도 힘들다. 따라서 이들은 밤에 더욱 많은 소통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이슬람을 밤의 문화는 카페에서 비록 술을 먹지 않지만 전통방식 커피와 물담배를 통해 많은 소통이 있었고 이러한 이슬람 사회는 술 중심 문화였던 유럽 사회에 비해 보다 이성적인 사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기술 발전과 문명의 발전이 빨랐을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과거 이슬람은 중세 암혹기인 종교 권력의 폭정에 시달리던 중세 유럽에 비해 대중들은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우세한 문명을 갖추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국 우세한 문명적 특성으로 이슬람 문명은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지배하여 오늘날 이스탄불이 탄생하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역사 속 제국들은 성장과 쇠퇴를 반복한다. 그런데 그 속에서 규칙을 찾아본다면 초기 국가 형성기에는 다양성의 가치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성장했다고 한다면 점차적으로 기득권으로 바뀌어 가면서 쇠퇴하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동로마 제국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기독교적 가치는 기득권이 되어 중세시대 암혹기를 이루었고, 이 시기 좀 더 개방적 문화의 이슬람 문명이 우세했고 결국 로마의 상징과 같은 곳이 오스만 투루크에 의해 함락되었다.

오스만 튀르크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은 서구사회 자극이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통하는 무역로를 잃은 유럽사회의 결핍과 이슬람의 커피 문물로 변화된 유럽은 르네상스와 대항해 시대를 열고 변화를 거듭하면서 현재 국제 질서의 중심이 되었다. 즉 변화를 만들어 가는 힘이란 그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변화 의지와 소통이라 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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