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익환 통일의 집 방문, 관람기(방북 31주년)
2020년 3월 우리는 코로나가 세상을 덮친 지금 정말 익숙하지 않은 세상 속에 갑자기 살게 되었다.
거리에는 마스크를 쓴 사람들, 회사에서는 원격근무를 실시했고, 전 세계는 국경을 닫고 서로 교류도 못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변화된 일상이다. 심지어 국경이 사라진 유럽에서 조차 국경을 닫는 일이 발생했다.
이탈리아에는 심각하게 번지어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대응은 세계적으로 화재가 될 만큼 모범적이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일상이 코로나 19에 대한 대응으로 흡수되다 보니 남과 북관계 개선 등은 생각하기도 쉽지 않아 졌다. 이번 코로나 19로 인해 북한도 일찍이 중국과 국경도 닫아버렸다.
그런 상황에도 국내 마스크 생산이 부족해서 개성공단을 다시 돌리는 현실 대응 방안 등이 나오고 있다.
지금은 한국사회를 너머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이 글을 쓰는 시간도 과거를 추억하고 싶은 마음에 오래된 80년대 팝송을 들으면서 과거 추억과 그 시절의 사건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과거를 1989년 3월 25일로 이동해보려고 한다.
나는 그 시절 대학교 입학시험을 본 해였고, 인생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기에 그 당시 벌어진 내용에 대하여 깊이 의미를 생각해보지 못했던 기억이다. 그러나 그 당시 분위기로 느낀 것은 87년 민주화 운동이 있었고 88 서울 올림픽을 잘 치렀다는 자신감도 충만한 시절이었지만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통일에 대한 문제는 입에 꺼내기도 어려운 일이었던 기억이다.
나 역시 언론이 만든 편견 속에서 문익환 선생님의 방북을 해석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지금 다시 바라본 그 시절 문익환 선생님의 방북은 현재와 미래에도 영향을 주게 될 커다란 걸음이 있었다.
늦봄 문익환 선생의 방북은 이후 남북교류의 마중물이 되었다.
그는 1989년 첫새벽 남긴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시로서 그의 방북에 대한 복선을 남겼다.
그가 방북을 통해서 당시 김일성 주석을 만났던 장면은 세계적인 화재가 되었다.
늦봄 문익환 선생은 남한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평양을 방문한 사실이 충격이었고, 김일성 주석과 뜨겁게 껴안았다. 당시 북의 안내원은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저렇게까지 담대할 수 있을까? 남에서 재야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크다는 말인가? 정말 위대한 재야인사가 왔구나!”(<문익환 평전>, 실천문학사, 2004)
문익환 선생의 방북 사실이 알려지자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과 언론 매체 대부분이 그를 공격했다.
특히 문익환 선생이 허담 당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과 4·2 남북 공동성명을 함께 발표했지만 정부는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가 북한 방문 일정을 마치기도 전 ‘문익환을 통해서는 북으로부터 어떤 제안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노태우 정권과 보수 언론, 반공단체는 물론 문익환 선생이 속한 교단 안팎과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비판적 목소리가 나왔다. 사회가 혼란하고 이념과 노선이 확연히 갈리는 현상을 보이는 시기에 돌출적으로 평양에 가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회의론이 많았다.
오히려 문익환 선생의 방북이 정권의 공안몰이를 부추겨 민주화운동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을 만큼 선생의 방북은 그만큼 논쟁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오늘날 ‘문익환 선생의 방북 사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당시와 다르다.
이후 민주정권의 여러 차례 남북 기본 합의에 대한 시작이고 시민사회에서 시작된 통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2019년 한국사회의 언론 문제와 검찰 문제 등 다양한 선출되지 않은 권력 문제가 대두된 해였 지지만, 어쩌면 한국사회 근원적 문제시 작은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과거와 분단의 역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청산되지 못한 과거 친일 권력은 여러 차례 친일 정권을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이념화되면서 남북 갈등 관계를 통해 정권을 유지해왔다. 또한 사람들이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게 언론과 공권력은 정보를 왜곡하면서 차단해 왔다.
우리 시대 많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드러나는 시점 문익환 선생님의 그 당시 행보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의 절규가 담긴 시를 통해 우리는 그의 갈망을 느낄 수 있다.
- 문익환 -
난 올해 안으로 평양으로 갈 거야
기어코 가고 말 거야 이건
잠꼬대가 아니라고 농담이 아니라고
이건 진담이라고
누가 시인이 아니랄까봐서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또 펼치는 거야
천만에 그게 아니라구 나는
이 1989년이 가기 전에 진짜 갈 거라고
가기로 결심했다구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 있지 않아
모란봉에 올라 대동강 흐르는 물에
가슴 적실 생각을 해보라고
거리 거리를 거닐면서 오가는 사람 손을 잡고
손바닥 온기로 회포를 푸는 거지
얼어붙었던 마음 풀어 버리는 거지
난 그들을 괴뢰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인민이라고 부를 생각도 없어
동무라는 좋은 우리말 있지 않아
동무라고 부르면서 열 살 스무 살 때로
돌아가는 거지
아 얼마나 좋을까
그땐 일본 제국주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이천만이 한마음이었거든
한마음
그래 그 한마음으로
우리 선조들은 당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쳤잖아
아 그 한마음으로
칠천만이 한겨레라는 걸 확인할 참이라고
오가는 눈길에서 화끈하는 숨결에서 말이야
아마도 서로 부둥켜안고 평양 거리를 뒹굴겠지
사십사 년이나 억울하게도 서로 눈을 흘기며
부끄럽게도 부끄럽게도 서로 찔러 죽이면서
괴뢰니 주구니 하며 원수가 되어 대립하던
사상이니 이념이니 제도니 하던 신주단지들을
부수어 버리면서 말이야
뱃속 편한 소리 하고 있구만
누가 자넬 평양에 가게 한 대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구
객쩍은 소리 하지 말라구
난 지금 역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역사를 말하는게 아니라 산다는 것 말이야
된다는 일 하라는 일을 순순히 하고는
충성을 맹세하고 목을 내대고 수행하고는
훈장이나 타는 일인 줄 아는가
아니라고 그게 아니라구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맨발로 바위를 걷어차 무너뜨리고
그 속에 묻히는 일이라고
넋만은 살아 자유의 깃발로 드높이
나부끼는 일이라고
벽을 문이라고 지르고 나가야 하는
이 땅에서 오늘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
이 양반 머리가 좀 돌았구만
그래 난 머리가 돌았다 돌아도 한참 돌았다
머리가 돌지 않고 역사를 사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나
이 머리가 말짱한 것들아
평양 가는 표를 팔지 않겠음 그만두라고
난 걸어서라도 갈 테니까
임진강을 헤엄쳐서라도 갈 테니까
그러다가 총에라도 맞아 죽는 날이면
그야 하는 수 없지
구름처럼 바람처럼 넋으로 가는 거지
1989년 첫새벽에
문익환 선생님은 방북후 수감되고 냉전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던 정권과 왜곡된 언론시각으로 인해 문익환 선생은 자신의 진심과 방북 성과는 대중들에게 충분히 이해되지 못했다.
특히, 통일의 집은 많은 굴곡이 있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역사의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가 한국의 근현대 역사에 대하여 우리가 민감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사의 가해자가 여전히 한국사회 거대 권력을 가지고 있고 언론 및 교육, 사법 쪽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사회뿐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통치방법이지만 정권을 잡기 위해 외부 갈등을 유발한다.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북한과의 갈등을 유발하는 등 여러 가지 지나온 사건 등을 역사에서 알 수 있듯 한국사회 친일과 군사정권은
그동안 우리는 오랜 군사정권과 이어 친일 보수 정권의 집권은 국정교과서 움직임 등 역사왜곡 움직임을 경험한 적도 있고 이로 인해 현대사에 대하여 깊이 있고 객관적으로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가 어쩌면 시민사회가 통일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우리가 그의 방북과 의미를 되새길 이유이기도 하다. 2019년 북한산 둘레길을 넘어서 문익환 통일의 집에 방문한 적이 있다.
이곳은 경전철로도 이동할 수 있고, 북한산 둘레길을 산책하면서 들려도 좋은 곳이다. 한국의 역사를 이해시켜주고 싶은 외국인 친구 또는 고객사가 있다면 동반하여 안내하면서 한국의 분단 역사와 민주화 운동과 통일운동을 모두 소개할 수 있는 좋은 콘텐츠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익환 통일의 집은 가오리역에서 인수동주민센터 쪽으로 이동하면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관련 정보는 누리집과 주소를 통해 찾아갈 수 있다.
누리집 주소 : 문익환. 닷컴
주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인수봉로 251-38
https://place.map.kakao.com/698507716
주택가로 들어서면서 문익환 통일의 집이라는 간판이 있어서 이곳이 박물관인 줄 알게 되지만 누구나 생각하는 박물관은 아니다 보니 처음에 들어가기에 머뭇거리게 되거나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면 문익환 선생님의 따님이신 문영금 관장님을 만날 수 있다.
통일의 집에는 늦봄 문익환 목사와 그의 아내 봄길 박용길 장로의 유품 2만 5천이 남겨진 곳이다.
생전에 문익환 목사님과 박용길 장로님이 생활하던 곳이고 이곳에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해서 2018년 6월 개관하게 되었다.
그의 옥살이는 수인번호는 훈장이기도 하다. 수많은 옥살이를 통해 겪은 고통은 그가 싸워온 세월의 흔적이고 민주주의의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
반면 미국의 남부교회가 평양 등에 위치하면서 다른 성격의 교회가 한반도 지역별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도 만주지역에 자리 잡은 캐나다 교회의 경우 민주적이고 지역자치를 강조했다고 한다. 따라서 함경도,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 등 활발했던 것도 이러한 자치적인 환경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인재를 마을에서 키워서 해외 유학도 보내는데, 문익환 선생님의 아버지는 캐나다로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러한 지역 배경 때문에 문익환 선생님 주변에는 윤동주 시인, 장준하 선생과 같은 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강제병합을 허용 후에 한반도에는 미국식 기독교가 자리 잡았고 이러한 기독교는 서구적 침략 수단이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식민지 개척 시 종교 침투는 일반적인 접근이었다고 보인다.
특히, F.D. 러가드(Frederick John Dealtry Lugard: 1901.1.22 – 1945.4.11)는 나이지리아 총독을 지내기도 한 영국의 식민지 관리로서 두 가지의 도덕적 사명을 주장했다. 하나는 유럽 문명의 복음을 식민지에 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치되어 있는 식민지의 자원들을 세계경제를 위해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러가디즘이라고 해서 20세기 초에 유럽 각국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주장이다.
문익환 목사가 꼼꼼히 기록한 수첩 중 당시 89년 5공 청문회 스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의원 시절 신문 스크랩은 무척 이채롭다.
벌써 2019년 작년 우리 일행은 관람을 마치고 나가는 길에 문영금 관장님이 마당에서 키우셨던 단감을 하나씩 받았다.
이곳은 박물관이지만 정부지원이 없다 보니 재정적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박물관의 경우 주차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시설을 갖추기 어렵기에 박물관이 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이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운영을 해야 하기에 재정적으로 어려운 이유라고도 한다. 방문하시는 분들의 작은 후원도 좋을것 같다.
어렵지만 힘들게 민주화 역사를 지켜가는 후손분들께 존경심을 보낸다.
문익환 통일의 집과 함께 주변에는 문익환 선생님이 다니시던 한신대학교가 있다.
한신대학교는 민주화 인사들이 많은 학교 중 하나로서 우이 경전철 화계 역에서 가깝고 근처 화계사를 거처 가까운 곳에 등산을 할 수도 있는 곳이다.
한신대학교 교내에서도 문익환 선생님을 기념한 작품을 만나볼수 있다. 통일의 집을 방문하는 여행객은 함께 주변을 보면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것 같다.
전 세계가 코로나 19로 못 다니는 세상이 되었지만, 언젠가는 다시 교류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남과 북의 문제가 어려운 것은 다른 나라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그런 기약조차도 쉽게 하기 어려운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북한만 빼고 전 세계 모든 국가를 다닐 수 있다. 공산주의 , 자본주의 국가의 구분 문제도 아니다.
오로지 같은 남과 북 사람들만 서로 다니지 못한다.
코로나 19가 마무리되어 우리가 세계를 다시 자유롭게 다니게 될 시점 북한도 예외가 아니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