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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빛나무 Nov 03. 2019

수많은 이순신을 만드는 사회

 낡은 기득권에 맞서 싸워온 사람들

화려한 도시에서 찾은 슬픈 영웅들


퇴근길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우리가 사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과거 역사의 유물이 있는 장소에 새롭게 현대식 건물이 들어선 복합공간이다.

최근에 종로거리는 새로운 고층빌딩을 지으면서 과거 유적을 발굴하여 바닥에 남겨놓는 방식으로 개발한다.

역사와 미래적인 건물이 잘 조화를 이룬다.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도시의 불빛과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거리에서 타이머신을 타고 과거로 간다면 어떤 모습일까?  나는 이 공간에 살던 많은 사람들의 역사를 생각해 본다.

우리의 삶과 그들은 달랐을까? 아니면 우리는 똑같이 반복하고 살고 있을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길을 걸어가다가 어떤 비석을 발견했다.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그리고 건너편에는 녹두장군 전봉준 상이 있다.

비석이 보여주는 곳은 역사 속 한 인간의 많은 갈등이 있던 곳이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곳을 의미한다.

그 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세대를 넘어 변화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실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누군가 변화를 실천하려고 하거나 개혁을 하겠다고 하면, 항상 변화를 막으려는 반작용이 나타난다.


심지어 혁명 같은 변화가 그 시대에 꼭 필요한 것 일지라도 기득권은 자신의 힘을 빼앗길까 두려워 변화를 막으려 한다. 뿐만 아니라 변화를 막는 것뿐만 아니라 적과 싸우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장수를 내치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자신의 권력 지킴이 더욱 중요한 것이 권력 가진 자들의 속성이다.


지금까지 이야기는 동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려는 농민들에 대해 권력 위기를 느껴서 외세까지 끌어들여 제나라 민중들을 학살한 조선왕조 이야기와 임진왜란에 선조가 뛰어난 공을 세웠던 이순신을 감옥에 가두고 백의종군하게 한 이야기이다.


충무공 이순신과 전봉준 공통적으로 모두 그 시대에는 기득권자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인지 모른다. 이순신은 왕과 관료들에게 배신당하고 전장에서 죽어갔고, 전봉준은 새로운 혁명을 하려다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당하고 죽었다.


외면받던 당 시대의 정의는 100년 넘는 시간 지나서 이 땅에서 비석과 동상으로 기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현재 정의가 탄압받고 외면받는다고 정의가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하고 이어가야 할 정의는 여러 세상을 지난 후 다시 우리 속에서 기억하게 된다.



충무공 이순신 백의종군로 출발지


백의종군은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 있다가 선조의 명을 받고 벼슬 없이 출정하게 된 사건으로 그런 역사적 장소의 비석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것은 명예가 중요한 군인이고 장군인 이순신은 철저하게 왕과 주변 권력에 외면당하면서도 백성들과 함께 왜적을 물리치는 치열한 싸움을 했다.

이순신뿐 아니라 조선시대 조광조와 같은 개혁가 역시 모략을 받고 죽어야 했다.


역사상 많은 기회주의적 인물은 당대의 역사 속에서는 단죄되지 않고 정의로운 사람들이 비극을 맡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개혁적이고 양심적인 사람들은 이기적이고 노회 한 모략가들에 의해 억압당했다.


역사는 수 없는 세월을 지나서 반복되기도 한다.

백의종군로 출발지 표지석


표지석이 있는 거리



이 시대의 기득권


해외사업으로 경험해보았지만 식민지로 아픔을 겪었던 국가들이 많은 아프리카 국가 정치인들은 식민지 모국인 미국, 영국 등에서 공부하고 온 유학파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미국 및 영국 등 유명대학에서는 아프리카 및 개도국에서 오는 정치가들 및 관료로 키워질 사람들을 키운다. 졸업 후에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높은 자리에 가면 계속 관리하며 교류한다.


해방 후 미군정시대 프린스턴 및 하버드대학교를 나온 이승만 정권이 시작되어 왔듯이 정권 탄생과정에서 보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들은 오랫동안 집권을 하기 위해 여러 트릭이 사용된다. 다양한 간첩사건 조작 및 미디어와 사법권력을 잡고 반대파를 숙청한다.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 사례를 보면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북풍을 통한 총격 사건 등 것이다.

과거 한나라당 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청와대 행정관 등 3명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 측에 휴전선 인근에서 무력시위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아프리카 권력자들 역시 선거 때가 되면 우리가 북풍을 통해 사람들의 여론을 움직일 듯 국경선에서 총격전을 만들어서 내부 결속을 한다.

일반 대중들은 그런 사실을 모르기에 현재 권력을 지지하고 장기집권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정치권력은 경제권력으로 공고해진다. 식민지를 겪었던 국가일수록 대형 이권을 특정 권력층이 독점하는 경우가 많다.


모두가 알다시피 한국사회 역시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식민지로 혜택 보던 세력이 지금까지 승승장구 해온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미국 국적을 가지기 위해 원정출산을 하고 거대 사학을 가지고 언론과 검찰 권력을 가지고 있어 식민지 지배자들처럼 영위해 오고 있다.

 

뉴스타파에서 친일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면 한국사회가 여전히 친일 기득권 사회라는 것을 보여준다.



캠퍼스 곳곳을 활보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은 무더운 날씨에도 활기가 넘쳐 보였다. 현재 서울대 학부 신입생 정원은 3천 명 정도, 우리나라 전체 수험생은 60만 명이 넘으니 이곳의 학생들은 성적으로 따지면 그야말로 최상위권이다. 단순하게 계산해서 우리나라 수험생들의 서울대 진학 확률은 0.5%가 되지 않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특정한 사회 집단의 서울대 입학 비율이 20%가 넘는다면? 엄청나게 학습 능력이 뛰어나거나, 아니면 매우 높은 수준의 교육적 지원을 받은 집단일 것이다. 뉴스타파가 학력과 직업 등을 확인한 친일파 후손 1,177명 가운데 268명이 서울대 출신으로 나타났다. 비율로 따지면 22.8%다. 연세대학교 68명, 고려대학교 51명을 합치면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이 3분의 1에 달한다.


물론 이 1,177명은 각종 검색 작업을 통해 확인이 가능한, 이미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SKY 출신이 ⅓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높은 수치다. 단순한 개인적 재능 이상의 배경이 작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서울대의 경우는 역대 총장 가운데 3명이 친일파 후손으로 나타났다. 서울대의 전현직 교수 36명도 친일파 후손으로 조사됐다. 단일 대학교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다.

친일 후손들의 화려한 학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수십 년 동안, 아니 현대도 한국 사회에서 성공의 확실한 보증 수표는 명문대 졸업 경력과 선진국 유학의 조합이다. 그래서 친일 후손들의 유학 경험 비율을 조사해 봤다. 결과는 1,177명 가운데 319명, 비율로는 27%였다.   -  뉴스타파 친일과 망각(https://815.newstapa.org/#/2)에서



최근 나타나는 현상을 보면 젊은 인재로 알고 있는 서울대, 연대 고대 학생들 조차 이젠 혁신보다는 기득권 사회 속 편입을 위한 준비를 한다. 그들은 중, 고등학교에서 고액과외 및 수시를 통해 입학하지만 부모의 재량에 따라 학벌에 차이가 발생하는 구조가 되었다.

 

부를 획득한 모든집단을 친일권력으로 일반화 할수 없지만 친일 정치권력으로 부를 획득한 집안에서는 부모의 학벌과 재력이 자식대에 이어지고, 정치권력, 언론 권력, 사법권력, 교육권력, 자본권력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집단의 중심을 이루며 사회 지배계층으로 더욱 공고해졌다.

아직도 많은 학교재단은 그렇게 형성된 곳이 많고 정당과 사법부에 특히 많은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보면서 부모의 친일 행위로 인하여 불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부모세대의 기득권을 가지게 됨에 대하여 역사적 화해를 위한 원죄의식이라도 기대하면 너무 무리인지 모르겠다. 최소한의 염치와 함께 자중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그들의 자식들의 뉴라이트 및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행위는 정말 안타깝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과 싸움


종각 4거리 길을 건너가면 동학혁명을 이루려는 전봉준 장군상이 있다. 그는 녹두장군으로 불리며 민중들을 대표하여 새로운 조선을 만들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려는 장본인이다.


혁명이란 목숨을 걸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그 싸움은 당대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지만 시간이 지난 후 그들이 바라던 세상이 되어서야 그들의 큰 족적은 기록된다. 그리고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은 당대에는 별일 없었지만 두고두고 역사 속에서 비난받는 존재들이 된다.


2019년 한국사회의 검찰개혁, 정치개혁이 화두이다. 언젠가 개혁이 되면 검찰과 사법 적폐, 언론 권력들은 역사 속에 비난받는 존재들이 될 것이다.

지금 그런 현상들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비록 주류 언론은 이런 주제에 대하여 검찰에 유리하게 방송을 하고 검찰개혁을 하려는 주체에 대한 가족, 친지에 대해 사냥감을 쫓듯이 공격을 한다.


한국사회 검찰과 언론은 모두 한국사회 기득권이고 엘리트 계층이기에 서로 간 동업자 의식을 갖는다.

역사적으로도 검찰 권력과 언론권력은 일제시대 완성되어 식민지 권력이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었지만, 군사독재 시기 검찰보다 강한 군 정보기관이 있었고 민주화 후 언론과 검사들이 권력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보면 본질적으로 권력 이동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 있다.

영화에서 1987을 보면 검사 및 언론보다 그들보다 강한 군권력에 대하여 그들도 시민 편에서 싸웠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검사와 언론 권력 강화를 가져왔다.

영화 "1987"에서 검사가 기자에게 정보를 건넨다.

영화 내부자를 보면 현재의 권력의 중심에 있는 검사들과 언론권력을 잘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는 조중동을 밤의 대통령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들이 만드는 여론에 의해 많은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래서 영화 속 언론사 사장은 민중은 개, 돼지니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영화 "내부자"에서 언론사 사장의 이야기



실제로 이번 법무부 조국 법무장관 가족에 대한 검찰의 수사에서 우리는 이러한 권력관계를 모두 보게 되었다.

언론은 사람들의 생각에 관념을 만들어 주고 검찰이 기소를 통해 피의자에 대한 이미지를 정교하게 만들고 언론은 수많은 기사로서 대중을 선동한다.


이번에 많은 사람들이 서로 정치 이야기를 꺼릴 정도로 분열하게 된 이유도 이러한 언론과 검찰의 역할이 크다.

시간이 부족한 많은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복잡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사실 검증을 위해 자기 스스로 찾아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언론과 검찰을 믿게 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2019년 과거와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거의 대부분이 언론의 시각에 일치해야 하는 시점에 언론과 검찰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규모 집회를 통해 메시지를 통일했다.

서초동 집회에서 본 것은 진화된 집단지성이 만든 시민혁명이라는 생각을 했다.

기존 언론이 아닌 독자적인 소셜 네트워크 상의 판단을 통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 과거에는 불가능한 일이 스마트폰 대중화와 소셜 네트워크 발전에 따라 나타난 현상인 것이다.

서초동 촛불집회는 중년 청년, 장년 등 다양한 계층이 카톡뿐 아니라 페이스북 등 개방형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여러 가지 논리와 의견을 종합적으로 본 사람들이라는 것이 다르다.


반대급부적으로 위기를 느낀 보수 정치인들은 규모를 키우기 위해 보수 기독교를 활용했다.

그러면서 종교가 정치색을 띄기 시작했고, 과격한 청와대 돌파하여 대통령 목을 따자는 이야기까지 한다.

실제로 과거 보수 기독교는 많은 학살을 자행한 적이 있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 서북청년단과 같은 보수 기독교와 반공이 결합된 집단은 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반인륜적 행위를 했다. 최근 보수집회에서는 공공연히 서북청년단 재건과 같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녹두장군 전봉준 동상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보면, 근본적으로 권력을 가지기 위한 싸움터이다.

그 권력의 중심에는 정보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이유로 조선시대에는 사대부들이 글이 쉽게 읽히는 것을 반대하여 한글이 확산이 안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헌법 등 법률 용어는 아주 어렵게 만들어 있다.

또한 미디어를 통해 대중을 길들이기도 한다. 자신들이 불리한 사건이 있을 때는 다른 연예기사를 크게 부각하거나 혹은 여러 가지 뉴스 비중을 조정하여 사람들이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한다.


모든 미디어가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디어는 생성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정치성을 띤다.

대부분의 주류 언론은 보수정권에서 만들고 더 나아가서는 일제시대 만들어졌기에 보수적 정치성을 가진다.

근본적으로 정보는 권력이다. 그래서 권력자는 언론을 통한 사람들을 통제하고 여론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언론과 권력의 유착은 무서운 것이다. 사실 과거 조지 오웰의 소설 "1984"가 실현되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소셜 네트워크와 같은 양방향 정보소통은 결국 세상의 많은 권력관계 불평등 해소를 위한 소통방식과 학습되는 방식을 개선할 수 있다.




수많은 이순신이 만드는 사회


우리는 역사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역사와 현실을 직접 연결해서 보게 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조광조와 같은 개혁가와 이순신처럼 대중적 신뢰를 받고 있던 사람들이 죽고 쓰러져갔다.


그런데 현재 발생하는 일은 과거의 뿌리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없다. 또한, 그 맥락이 연결되어 현재에도 비슷한 흐름을 만들어 낸다. 가까운 근세에 3.1 혁명으로 우리는 상해 임시정부를 통한 공화정의 시작이 되었고 그 이전에 동학운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탄압받았다.


동학운동은 당시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만 2017년부터 2019년 현재 우리들이 들었던 촛불 속에 있고,  87년 민주화 시위를 하던 넥타이부대와  5.18 광주의 시민 속에 있었고 100년 전 3.1 혁명을 위해 일어난 시민들에 의해 깨어났다.


우리는 민주화 과정에서도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계엄군의 탱크와 총검에 죽었다.

민주화를 이룬 후에도 가장 큰 권력이 된 엘리트 언론과 검찰은 무자비하게 사람들을 여론몰이로 마녀사냥을 했다. 강기훈 유서대필로 몰아서 징역살이를 하게 했고, 검찰과 언론의 인신공격으로 생을 마감한 노무현 대통령과 노회찬 의원은 이 시대의 이순신이고 전봉준이다. 이들은 비록 진 것 같지만 그들의 진정성에 의해 우리는 검찰과 언론의 행위를 알게 되었다.  


특히 검찰이 조국과 그의 가족에 대한 먼지 털이식 수사는 우리 상식과 달리 전개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란음모에 대한 조사와 자유 한국당에 대한 수사는 피하고 오로지 검찰개혁을 하려는 조국 장관 가족의 표창창 위조 수사와 검찰을 비판하는 작가에 대한 수사는 빠르게 전개하고 있다.


세월호 가족에 대한 수사, 가습기 살균에 대한 수사는 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만 모든 수사력을 동원한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시민들이 언론의 프로파간다에도 검찰개혁 요구에 대한 검찰 조직의 반란의 본질을 깨닫고 검찰개혁의 당위성이라는 큰 줄기만 남을 것이다.


2019년의 여러 가지 이슈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구조가 합리적인지 의심하게 되었다. 특히 올해 초에는 사립 유치원이 국가 보조금을 받고도 회계를 투명하게 하지 않는 이익단체로서 유치원 등 사학의 문제가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시민들은  스마트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형성된 집단지성의 판단으로 형성된 여론을 보게  되었다.  이제 시민들이 함께 변화를 위해 스스로가 미디어가 되며 전통 미디어에 맞서고 있다.

각자의 시민들이 이순신이나 전봉준 인 것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애착이 생기는 이유는 사람들이 가진 집단지성을 통한 변화 가능성 때문이다. 이번 집회는 구조에 도전하는 시민혁명이고, 집단지성을 통한 직접민주주의 실현이다.


특히 집회 주체측도 예상하지 못할정도로 소셜 미디어가 서로 시너지를 일으키며 집단지성의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 간다. 특이한 현상은 대부분의 언론이 의도를 숨긴 검찰발 이야기를 했는데 집단지성은 사회권력 구조와 언론의 의도까지 집단적으로 눈치채고 차단하면서 복잡한 역사문제까지 청산하려는 단계에 이른것 같다.


시민단체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분분한 사항에서도 집단적 의사결정에 따른 판단이 비록 느리지만 가장 정재된 이야기들만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던것 같다.


무엇보다 많은 시민들이 사회 구조에 대한 개혁을 외쳤다는 점에서 프랑스 68혁명에서 사회구조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던 시기와 닮아있다. 그시기를 기점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회로 명명했듯 우리는 이시기를 후대에 어떻게 명명하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 새로운 진화를 하고 있다.


서초 공수처 설치 촉구 집회


공수처 설치 서명받는 시민단체 활동




언젠가 현재의 검찰과 언론의 광란의 칼춤이 잊히지 않도록 이 글을 남겨본다.

혁명이란 세상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기득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왜곡과 야비함으로 상대를 무너트린다.

그렇게 많은 민주 열사들의 맨몸으로 부서지고 깨어지며 만들어진 작은 오솔길에 우리가 서있다.

먼저 간 사람들이 만들고 닦아놓은 길에 이젠 많은 시민들이 큰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훗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된다면 이 시대 희생했던 많은 이들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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