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의 시대를 넘어, 문명의 규칙을 다시 묻는다
나는 모든 논의의 출발점에서 시간과 공간 속 좌표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지 못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시대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의 변화를 먼저 되돌아본다.
오늘날처럼 변화가 격렬하게 촉발된 시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서구 사회의 르네상스를 떠올릴 수 있다. 르네상스는 인쇄물의 혁명과 같은 기술적 변화 속에서 중세인들의 자각을 바탕으로 시작된 사회 변동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인간을 신의 질서 속 피조물이 아니라, 이성과 주체를 가진 존재로 재발견한 이 사상적 혁명은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산업혁명으로 이어지며 인류를 오늘의 산업사회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수많은 갈등과 폭력, 저항과 타협이 뒤따랐다.
우리는 종종 산업시대를 과거 왕조시대의 연장선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공화정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대통령을 왕처럼 인식하는 문화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산업시대는 문화·제도·정치 전반에서 왕조시대와 분명한 단절을 이룬 시대다.
이러한 전환이 두드러질 때마다 정치·제도적 격변, 즉 ‘혁명’이라 불리는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등장했다. 프랑스혁명과 동학혁명은 그러한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낸 대표적 사례다.
혁명이 만들어낸 변화는 분명했다. 신분이 아닌 시민, 충성이 아닌 권리, 신의 질서가 아닌 법과 제도가 사회를 지탱하는 기준이 되었다. 왕과 귀족의 권위를 무너뜨린 혁명은 이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며 사회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성이 만든 세계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수많은 기술을 탄생시켰고, 문명의 정점에서 인류는 문명의 충돌 속에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세계대전을 경험하게 된다.
전쟁을 통해 드러난 인간성의 상실은 이성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전쟁 이후 성장한 경제 속에서 자라난 세대는 이전 세대가 만들어낸 구조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1968년, 이른바 ‘68 혁명’이며 우리는 이 시기를 포스트모던 시대로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다양성과 문화 융합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고, 그 문화적 토대 위에서 IT 산업이 성장했다. 우리가 잘 아는 애플을 비롯한 실리콘밸리 기업들 역시 이러한 시대정신 속에서 탄생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또 하나의 기술적 변곡점, 인공지능이 등장했다.
그동안 우리가 마주해 온 기술과 사회 변화는 과거 변화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러나 이번 변화는 산업혁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기계가 인간의 근육을 대체했던 시대를 넘어, 인공지능은 인간의 판단과 사고, 창조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생산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문명 규칙 자체의 재편을 요구하는 변화다.
이 소제목에서 미래를 ‘과거’라고 표현한 이유는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인류는 산업 발전의 지속적 흐름 속에서 이미 인공지능 시대를 오래전부터 예견해 왔다. SF 영화 속 디스토피아적 미래 이미지는, 이성을 찬미하던 산업사회가 결국 전쟁이라는 비극으로 귀결되었던 인류의 경험을 반영한 상상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예견된 과거’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기술이 축적된 사회에서 각국은 패권 경쟁에 뛰어들었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강력한 동원 체제가 필요해졌다. 그 결과 국가주의가 강화되고 파시즘이 대두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극우화 현상 역시 새로운 시대적 가치를 받아들이지 못한 기득권 세대와, 과거의 비극을 충분히 기억하지 못하는 일부 젊은 세대 모두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말하자면, 68 혁명이 제시했던 새로운 인류 실험의 가치는 아직도 겨울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흐름은 최근 한국 사회와 미국의 상황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 사회에서는 극우 성향의 사이비 종교 집단이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제정일치 사회를 꿈꾸는 모습까지 드러냈다. 존재하지도 않는 소련 공산당을 타도하겠다거나, 이미 자본주의화된 중국 공산당을 적으로 설정하는 등 시대착오적 구호가 난무하고 있다. 여기에 철지난 매카시즘 이데올로기를 되살려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극단적 언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미국에서 발생한 ICE 요원의 민간인 총격 사건은 국가 폭력이 얼마나 쉽게 일상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피로 물들어 세워진 광주 민주항쟁의 기억, 곧 민주주의가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소환한다.
한국은 2024년 12월 3일 내란 사태를 통해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놓여 있는지를 다시 확인했다. 그해 한강 작가의 말처럼,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했고 과거가 현재를 도와 내란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본질을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친일 기득권과 사법 권력, 종교 권력이 연합해 시민 민주주의에 대항한 사건이었고, 그 수단으로 계엄령이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사법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내란적 흐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패권 약화와 중산층 붕괴, 금융자본의 무책임한 행태에 분노한 시민들의 틈을 타 혐오와 파시즘적 정치가 대두되고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누적된 경제적 피로 속에서 집권 권력은 민주주의의 외피를 벗고 내부 통제와 배제의 정치로 기울고 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이 나치즘으로 향했던 과정과 닮아 있다.
이란에서 벌어진 대규모 학살 또한 마찬가지다. 종교 권력이 젊은 세대가 더 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에 이르자, 종교의 권력화에 저항하는 시민들과 이를 지키려는 종교 권력이 충돌하며 극단적 폭력으로 이어졌다. 세계 곳곳에서 강화되고 있는 권위주의적 통치 역시 개별 사건이 아니라, 쇠퇴하는 권력이 자기 보존을 위해 선택한 폭력이라는 공통된 성격을 지닌다.
한때 실리콘밸리는 68 혁명의 진보적 가치를 계승한 기업들이 주도하던 공간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파시즘적 미국 중심주의와 기술 패권 의식을 앞세운 기업들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다. 테슬라와 팔란티어와 같은 기업들,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로 불리는 인물들이 그 중심에 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극우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 기업은 과거 실리콘밸리가 꺼려왔던 군사 기술 활용에도 적극적이며,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전쟁과 통제에 활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는 무분별한 인공지능 기술 패권주의의 도래를 예고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의 핵심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인류는 다시 한번 산업시대 전쟁의 비극을 반복할 것인가. 우려스러운 점은 이들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수장들이 마치 디스토피아의 악당처럼 기술 권력의 중심에서 세상의 질서를 자신들이 설계할 수 있다고 믿으며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의 현실로 돌아와 보아도 쉽게 풀리지 않는 갈등이 존재한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는 CES 2026에서 ‘아틀라스’라는 로봇을 선보였고, 세계는 그 정교함에 놀랐다. 곧 생산 현장에 투입될 것으로 보이는 이 기술에 자본은 즉각 반응했고 주가는 상승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단 한 대의 로봇도 작업 현장에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과, 노동을 통해 이익을 분배받아온 노동자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립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기술의 변화를 막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과거 자동차 산업 초기에 ‘빨간 깃발법’이 산업 발전을 가로막았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은 로봇의 산업 현장 도입을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노동조합의 문제 제기를 비하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그러한 비하를 하는 사람들 역시 자본의 탐욕이 극대화 되었을 때 구제받지 못한다.
오히려 포드자동차 공장에서 헨리 포드 2세와 전미자동차노조 위원장이었던 월터 로이터가 자동화 설비를 둘러보며 나눈 대화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헨리 포드 2세: “위원장님, 이 기계들은 어떻게 노조로 조직하실 건가요?”
월터 로이터: “회장님은 그럼, 이 기계들에게 어떻게 포드 자동차를 파실 생각이신가요?”
그러나 생산시설을 독점한 자본의 탐욕을 공존으로 전환할 수 있을까. 모두가 기본소득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만, 그 과정이 과연 평탄할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류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볼 때, 여전히 험난한 과정이 남아 있다.
답은 분명하다. 도덕적 각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역사적으로 자본이 공존을 수용한 순간은 단 한 번도 자발적이지 않았다. 언제나 시민의 저항과 제도의 개입, 규칙의 재설계가 뒤따랐다.
AI 시대의 과제는 기술을 멈추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 발전을 전제로 생산수단의 정의를 다시 쓰고, 노동 이전의 권리를 확정하며, 자본의 속도를 민주주의가 따라잡을 수 있도록 규칙을 세우는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생산에서 해방되기는커녕 알고리즘과 자본의 통제 아래 더 깊이 예속될 것이다.
산업혁명이 “어떻게 더 많이 생산할 것인가”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생산에서 해방된 인간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지켜내는 새로운 규칙과 구조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요구된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 사회는 파시즘과 불평등으로 퇴행할 것이고, 이 질문에 답하는 사회만이 민주주의를 갱신하며 다음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지금은 기술의 시대가 아니라 철학과 규칙을 다시 세우는 시대다.
따라서 우리의 상상을 억압해 온 과거의 사슬을 끊어내야만, 미래로 한 걸음이라도 나아갈 수 있다.
민주주의와 같은 사회적 진보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존 역시 선언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시민이 만들어 온 결과였다. 시민의 각성과 집단지성이 변화를 행동으로 만들 때, 우리는 비로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맞이하는 새로운 르네상스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