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가진 한계점과 청산방법
우리는 2026년 현재, 과거와는 다른 공기를 느낀다. 누구나 막연히 감지하고 있지만, 그 두려움의 실체를 명확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은 현실이다. 분명 세상은 변화하고 있는데, 그 변화의 방향 속에서 ‘나’와 ‘우리 공동체’는 어떤 변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불안이 공존한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은 마치 야누스의 얼굴처럼 우리에게 기회와 두려움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 글을 쓰는 2026년 1월, ‘January’의 어원이 야누스(Janus)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의미심장하다. 고대부터 태양력의 1월은 생명의 죽음을 상징하는 겨울이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기대하는 시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성찰하기에 더없이 적절한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변화의 ‘결과’만을 이야기할 뿐 그 결과에 이르기 위한 우리의 본질적 변화에 대해서는 깊이 고민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공지능과 부가가치가 높은 창의적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의 관성을 그대로 따른다. 예를 들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면 가장 먼저 ‘관련 자격증’을 만들자는 논의가 나온다. 산업 초창기에는 일정 부분 타당할 수 있으나,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 환경에서 자격증은 오히려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자격증 중심으로 산업과 교육을 바라보는 방식은 과거 산업사회에 적합했던 사고방식이며, 지금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러한 근본적 문제의 배경에는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 식민지 문화의 속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문화는 대체로 ‘분할하고 지배하는(Devide and Rule)’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근대 산업사회를 거치며 교육에서의 서열화 같은 형태로 재생산되었고, 지배·피지배 구조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한국 사회의 교육제도는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사실상 서열이 강화된 군대식 교육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해방 이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기득권의 유지 속에서 더욱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변화하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서열 구조에 길들여진 대중이다. 근대 교육의 탄생 자체가 전체주의적 시대 배경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교육과 사회 제도는 애초부터 서열 구조를 통해 대중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래야만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성실한 노동자형 인간’을 대량으로 양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제도는 산업사회 근대화 과정에서 하나의 첨병 역할을 했다.
한국 사회의 극우 진영은 종종 자신들이 서구 사회와 이념적 공동체이며 제도 또한 동일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현재의 교육제도를 옹호하면서 중국을 비판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교육제도는 서구 사회의 일반적인 교육제도와는 상당히 다르다. 오히려 중국, 터키, 이란과 같은 국가들과 더 닮아 있다.
이들 국가는 공통적으로 ‘성적순–대학서열’ 구조를 가진 전형적인 시험국가(examocracy)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들의 공통점은 전체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서구 사회는 한 차례의 큰 사회적 진통을 겪으며 교육과 사회 구조가 변화했지만, 우리는 오랜 군사정권과 보수 정권을 거치며 과거의 구조를 거의 그대로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 역시 과거에는 우리와 유사한 전체주의적 교육 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68년, 이른바 ‘68 혁명’의 영향을 받으며 서열을 완화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교육 방식으로 변화했다. 미국·영국·캐나다 등은 대학의 자율성과 인성·활동 중심 평가를 통해 개인의 다양성을 더 많이 반영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산업이 탄생했고, 오늘날의 인공지능과 앞선 IT 생태계, 그리고 문화 역시 그 과정의 산물이다.
다만 자유주의적 철학에서 출발한 창의성은 시간이 지나며 능력주의에 대한 과도한 신봉으로 흐를 위험도 함께 내포하게 되었다. 오늘날 서구 사회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테크노 전체주의’로 기울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서구 사회의 발전 과정을 보면, 산업사회의 기계 문명에서 소프트웨어 및 플랫폼 산업으로 이동하며 교육 방식 역시 근본적으로 달라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산업사회에서는 기계에 적합한 노동력이 필요했기에, 깊이 있는 사고보다는 암기와 성실함이 중시되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를 지나 인공지능 사회로 접어든 지금은 질문하고, 문제를 발견하며,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필요하다.
한국형 교육과 입시제도는 산업화 시대에는 효율적이었을지 모르나, 실리콘밸리처럼 창의성과 다양성을 기반으로 혁신이 요구되는 시대에는 분명한 한계를 드러낸다.
강화된 서열 구조는 극우화되거나 파시즘화된 국가의 전형적인 사회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여전히 서열 중심의 조직과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는 배경에는 식민지 경험과 군사독재라는 파시즘적 역사 경험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서열화 구조의 핵심 특징은 경쟁을 촉진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경쟁이 쉽게 적대적 경쟁으로 변질된다는 데 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기업에서는 인사철마다 승진을 둘러싼 갈등이 반복된다. 특히 상대평가 체계에서는 이러한 갈등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달리도록 강요하는 사회와 조직에서는 서열 경쟁이 극단적으로 치열해진다. 이는 한국 사회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익숙하게 목격해 온 풍경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파시즘이 뿌리내리기 쉬운 토양이 된다.
반대로 조직 내에 승패 중심의 경쟁이 없을 경우, 구성원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만족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스포츠 역시 승패를 떠나 성취감 그 자체로 만족을 얻는 경우가 있다. 각자가 다른 목표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을 때, 개인의 만족과 조직 전체의 발전 가능성은 함께 높아진다.
그러나 경쟁 중심 구조 속의 개인은 필연적으로 고립된다. 모두가 잠재적 적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투계장이나 투견장에서 서로를 싸우게 만드는 구조와 닮아 있다. 조직은 이를 ‘관리’라고 부르지만, 그 안에 놓인 개인들은 서로를 소모시키는 존재가 된다. 이런 환경에서는 연대와 신뢰가 자리 잡기 어렵고, 혐오와 배제가 결속의 방식이 되기 쉽다.
더 나아가 우리는 아파트와 같은 분절된 공간에 익숙해지며 이웃과의 교류보다는 간섭받지 않는 삶을 택해왔다. 그 과정에서 혐오는 내면화되고, 공동체가 붕괴된 자리에는 ‘외로운 늑대’들이 남는다. 이는 극우화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한국 사회에서 흔히 목격되는 모습은 상위 계층이 하위 계층을 무시하는 태도다. 특히 이명박 정부 이후 교육 서열화 강화와 사회적 프로파간다의 영향 속에서, 개인의 실제 능력과 무관하게 능력주의를 절대적 가치로 신봉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 결과 부와 가난이라는 경제적 조건뿐 아니라, 신체적 약자와 외국인에 대한 혐오로까지 이어진다. 능력주의는 이데올로기처럼 작동하며, 메카시즘적 성격을 띠게 된다. 자유민주주의와 능력주의를 동일시하는 오류 속에서, 능력주의는 계급 질서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된다.
미국의 진보주의 역시 능력주의를 중시하지만, 그것은 다양성과 기회의 평등을 전제로 한 능력주의다. 반면 한국 사회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조건, 즉 바꾸기 어려운 계급적 요소를 능력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 과거 정유라가 "능력 없으면 너네 부모 원망해… 돈도 실력이야”라고 한말에서 나타나는 계급적 특징을 통해 차별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돈도 실력”이라는 발언에서 드러나듯, 이는 명백한 계급 차별의 논리다.
변화할 수 없는 사실을 이데올로기나 규범처럼 받아들이는 순간, 그것은 파시즘이 된다. 히틀러와 나치가 그러했고, 그러한 폭력은 파시즘이 내면화된 대중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윤석열 역시 대표적인 파시스트적 성향을 보이며 계엄을 선포했다. 만약 그것이 성공했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윤석열을 지지하는 일부 계층은 약자에 대한 혐오를 집단의 정체성처럼 공유한다. 스스로는 가난하면서도 부자들의 종부세를 반대하고, 대기업 규제를 ‘경제 파탄’이라 걱정하는 모습은 이 모순을 잘 보여준다.
한국 사회의 많은 시민들은 오랜 전체주의 경험 속에서 자신이 무엇에 길들여져 있는지조차 인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이제는 각자 내면화된 파시즘과 전체주의적 사고를 하나씩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다.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인식하고, 변화하려는 사람들은 늘어나야 한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오랜 성찰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극우 파시즘화는 공동체 붕괴와 개인화의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한국 사회의 많은 문제는 교육, 군대, 정부, 기업 등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서열 구조에서 비롯된다. 교육 개혁의 핵심 역시 서열을 해체하는 데 있다. 정부와 기업의 과도한 서열 구조 또한 조직의 효율성을 오히려 저해한다.
교육에서의 서열 문제
군대·정부 조직의 서열 구조
기업 조직 내 서열화
정치 세력 내부의 서열 구조
87년 이후 변화가 있었고, 시민운동은 부족함 속에서도 한국 민주주의를 확장해 왔다. 정보통신의 발전은 조직 내부의 소통을 촉진하며 시민사회의 민주성을 강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열 구조는 완전히 해체된 적이 없다. 심지어 시민운동의 주역들조차 독재에 맞서기 위해 조직적 강인함을 강조하며 서열 구조를 유지해 온 모순을 안고 있다.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과거에는 뉴스와 사회 분위기에 길들여져, 최루탄에 쓰러지던 대학생들이나 휴전선을 넘나들던 문익환 목사와 같은 인물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이 있다. 시간이 지나 직접 세상을 경험하며 그 오류를 바로잡아가고 있지만, 정규 교육과 직장 생활을 거쳐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오류를 교정할 기회조차 갖기 어렵다.
"Le fascisme est en nous" (파시즘은 우리 안에 있다)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한 유명한 발언이다. 즉 파시즘이 단순히 외부에서 강요되는 정치 체제나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동 방식, 권력 관계 속에도 내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