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라 1988이 끝났다.
응답하라 1997은 화제가 되고 종영이 된 후에 추억을 되살리며 봤고
응답하라 1994는 매화를 기다리면서 설레면서 봤고
응답하라 1988은 그 잔잔한 매력에 빠져 시청했다.
나는 3개의 드라마를 다 봤는데 그중 응답하라 1997(이하 응칠)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응칠이 완벽하게 나의 세대 이야기는 아니지만 공감할 포인트도 꽤나 되었고 무엇보다 짧았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시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드라마라는 점이 좋았다.
응답하라 1988 (이하 응팔)은 좋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뒷심 부족이 보여 안타까운 드라마였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이야기의 집중이 안 되는 부분도 있었다.
응답하라 1994 (이하 응사)는 응칠과 응팔 중간의 느낌이었고...
서론이 길었다. 응팔이 끝났으니 응팔에 대한 간단한 리뷰를 하려고 한다. 참고로 객관성 따위는 없는 100% 주관적인 리뷰이다.
응팔이 시작되면서 가장 많이 걱정했던 것은 '과연 사람들이 이 시대에 공감을 할 것인가?'였다.
원래 응답하라 시리즈는 젊은 세대에서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었기에 1988년의 이야기를 공감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제작진은 이를 변하지 않는 가치로 슬기롭게 풀어냈다.
바로 '가족'이었다.
응팔은 사실 누구 하나 주인공이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쌍문동 5인방의 이야기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모님, 형제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리고 이러한 제작진의 의도는 시청자들에게 정확히 먹혔다.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부모님께 효도하고 형제들끼리 싸우면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세대 구분 없이 누구나 응답할 수 있는 포인트였기 때문이다.
응팔은 20부작이라고는 하지만 한 편당 거의 2시간 가깝게 하기 때문에 일반 드라마 식으로 보면 30부가 넘는 구성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드라마가 단순히 사랑 이야기와 추억 이야기만 했으면 성공하기가 어려웠으리라 본다.
가족이라는 키워드가 있었기에 우리는 88년도의 이야기에 공감했고 그 시대를 산 사람들은 추억하며 드라마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부분에서 보면 응팔은 아주 좋은 드라마라 할 수 있다.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를 말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바로 '남편'이다.
다른 드라마 같으면 그냥 '남주랑 여주랑 이어지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을 조금 더 비튼 장치가 바로 응답하라의 남편 찾기이다.
하지만 응팔 제작진은 '이번에는 남편 찾기보다는 가족에 집중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고 실제 드라마에서도 남편 찾기의 비중은 전작보다 확연하게 줄었다.
그러나 드라마 화제의 측면에서도 과연 그랬을까? 인터넷에서는 어남류, 어남택, 개떡러, 선택러 등의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고 언론도 '덕선의 남편은 누구인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필자도 지인이나 친구들과 이야기할 때 '응팔 그 가족 이야기 어땠어?'라는 말보다는 '덕선이 남편 누구지?'라는 말을 더 많이 했다. 내 주변 사람들도 그렇고.
결국 제작진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후반에 가서는 남편 찾기의 비중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의 호흡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가족 이야기 진행 때문에 제대로 전개 안 된 러브 라인을 후반에 들어서 갑자기 정리하려다 보니 시청자들에게 혼란을 주는 장면도 많아졌다.
오죽하면 남편이 중간에 바뀌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겠는가?
필자는 어남류를 지지하던 입장이었지만 택이가 남편인 게 개연성이 없다고는 생각 안 한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면 떡밥도 많았다.
내 생각으로는 원래부터 택이가 남편인 것은 맞는 것 같다.
다만 아쉬운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정환이라는 캐릭터를 심하게 낚시 장치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극 초중반까지 극의 흐름을 정환이에게 맡겼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성인역을 맡은 김주혁의 연기톤도 극초반이랑 후반이랑 다르다. 그냥 낚시를 위한 낚시였다 -_-;;
응답하라 시리즈가 반전이 중요한 스릴러나 추리물도 아니고 가족 드라마를 지향한다는 응팔이 이 굳이 이럴 필요가 있었나 싶다.
너무 낚시를 위한 낚시가 많았다는 것은 드라마로서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것도 같아서 아쉬웠다. 응답하라 시리즈가 계속 이어진다면 다음 편에서는 제작진이 남편 찾기라는 키워드에서 조금 자유로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다지만 이로 인해 극의 흐름이 엉성해졌다.
20화가 방영된 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응팔을 혹평하는 반응이 많았다. 전형적인 한국 드라마의 용두사미 결말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작진은 완성도를 위해 한 주를 결방했다. 그러면 당연히 완성도가 올라가야 하는 것 아닌가?
이래놓고 다소 두루뭉술하게 끝나버렸으니 마지막회의 모습이 더 아쉽게 남은 것 같다.
결방 안 했으면 뭐 어떻게 더 엉망으로 끝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_-;;
사실 응팔의 결말은 기존의 응칠과 응사하고는 다른 점이 많다.
먼저 동창회, 집들이라는 키워드로 성인이 된 소꿉친구, 하숙집 동기들이 다시 만나던 전작과는 달리 응팔은 단지 덕선이와 택이의 인터뷰로 진행이 된다. 중간에 보라도 오고 노을이도 오지만 이들은 덕선이의 가족이다.
가족과도 같았던 친구들과의 감동적인 재회는 없다. 그렇다 보니 그 시절을 추억하는 것은 철저하게 덕선이와 택이의 시점이다. 또한 시끌벅적하던 전작 하고는 달리 인터뷰는 정적으로 흐를 때가 많다.
두 번째로 친구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나오지 않는다. 첫 번째와 연결되는 것인데 친구들과 다시 모이지 않으니 지금 그 친구들이 뭘 하고 있는지, 결혼은 해서 자식들은 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전작의 경우에는 이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되고 심지어 비중이 그리 높지 않았던 캐릭터들의 근황도 나온다.
그러나 응팔의 현대 씬에서는 진주는 물론이고 가장 친했던 정팔이와 동룡이의 근황도, 성인이 된 모습도 공개되지 않는다. 이게 평범한 드라마였다면 서브 캐릭터들의 근황이 나오지 않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응팔은 엄연히 가족 드라마를 표방하였고 그중에서도 쌍문동 5인방은 시청자들에게 핵심적인 인물들로 인식이 되었다. 또 정환이는 극 전개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던 주인공 급 캐릭터였다. 그런 정환이가 사랑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18화 이후부터는 엑스트라 급으로 전락해 제대로 언급이 되지 않는 점은 응팔이 남긴 큰 아쉬움 중의 하나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결말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미 20년도 더 된 이야기. 그 시절의 친구들을 40대가 되어서도 계속 연락하고 지내는 것 자체가 판타지일 수도 있다. 당장 우리 주변을 생각해보자. 어릴 적 연락하던 친구들과 현재까지 연락을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가 않다. 아무리 친했던 친구라도 대충 근황 정도만 알면 다행이고 바쁘게 살다 보면 그조차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아마 응팔도 그랬을 것이다. 덕선-택 부부의 일상에서 정환이나 동룡이는 어릴 적 친구였지만 지금은 간간이 연락만 하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덕선이가 어린 시절 쌍문동 5인방과 놀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끝나는 엔딩은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그때의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엔딩이라 볼 수 있다. 작가도 이러한 관점에서 엔딩을 풀어갔을 수도 있고...
그러나 드라마가 꼭 현실적인 엔딩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응답하라 시리즈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 어릴 적 친하던 사람과 결혼하고 계속 화목하게 지내고 친구들은 졸업 후에 다들 엘리트가 되어 성공하고..
그러한 모습들은 현실에서의 좋은 점만 보여주는 드라마 만의 판타지적인 모습들이다. 응팔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극을 풀어갈 때가 많았다.
그랬던 응팔이 마지막 부분에 와서 현실적인 엔딩을 선택했다? 개인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엔딩이었다. 그러한 쓸쓸함을 드라마에서까지 느낄 필요가 있었을까?
쌍문동 5인방이 어른이 되어서 오랜만에 만나서 신나게 수다를 떨면서 장면이 전환되어 쌍문동에서의 5인방 모습으로 점차 돌아가는 모습으로 엔딩이 났으면 어땠을까?
응팔은 그렇게 끝났다. 작가의 뒷심 부족, 쪽대본, 생방 촬영이라는 한국 드라마의 현실은 응팔을 또 하나의 용두사미 작품으로 남게 만들었다.
하지만 드라마 전체적인 완성도까지 폄하하고 싶지는 않다. 훌륭한 대본이었고 멋진 연출, 그리고 드라마를 빛낸 배우들의 열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많은 배우들의 연기를 시청자들에 보여준 제작진과 배우들에게 고마웠다.
응답하라 1988은 끝났지만 이 배우들의 연기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앞으로 다양한 작품 속에서 다시 만날 그들을 기대해본다.
개인적으로 다음 응답하라 시리즈는 2002가 되었으면 하지만 제작진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다음 시리즈에서는 이번에 나온 단점을 보완해서 더 훌륭한 드라마가 나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