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을 좋아하는 이유
나는 호텔이 좋다. 그래서 출장을 좋아했다. 일을 끝내고 혼자 숙소로 돌아가는 그 순간이 좋았다.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걷고, 카드키를 대고 문이 열리는 그 짧은 동선 전체가 좋았다. 그날 하루의 하이라이트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방에 들어서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진다.
해야 할 일도 보이지 않고, 미뤄둔 생각도 없다. 집에서는 소파만 봐도 “청소해야 하는데”가 떠오르고, 식탁을 보면 “이것도 정리해야지”가 자동으로 따라붙는데, 호텔 방에서는 그런 생각이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곳에는 나의 과거가 없기 때문이다.
왜 내가 호텔을 좋아하는지,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나서야 알았다.
호텔은 기억이 없는 공간이다.
내 실수도, 내 역할도, 내 반복된 하루도 붙어 있지 않은 상태. 말하자면 ‘0’이다.
나는 그 ‘0의 상태’를 유난히 좋아한다.
방 안을 둘러보며 “어떤 곳일까” 하고 마음이 설레인다. 무언가를 잘해보겠다는 의욕도 없고, 과거를 곱씹지도 않는다. 그냥 오늘의 나로 존재해도 되는 느낌이다.
물론 지난 시간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 기억들이 나를 붙잡고, 자꾸 같은 길로 걷게 만든다는 것도 안다.
익숙함은 편하지만, 가끔은 발목을 잡는다.
그래서 오늘 자주 가던 산에 올랐다가 일부러 다른 길로 내려왔다.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늘 내려오던 길 말고, 그냥 다른 길로 가볼까?”
등산로가 바뀌었다고 인생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하산하는 시간 동안은 ‘0’에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완전히는 아니어도, 조금씩이라도 매일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
어제의 나를 참고자료 정도로만 들고, 오늘을 열어보고 싶다.
일상을 살다보면 그게 잘 안된다.
그래서 아마 나는 앞으로도 호텔을 좋아할 것이다.
그리고 가끔은 같은 산에서도 다른 길로 내려올 것이다.
크게 변하지 않아도 괜찮다.
잠시라도 ‘기억이 없는 상태’로 숨을 고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해보면 삶에 필요한 건 대단한 리셋이 아니라,
하루에 한 번쯤 0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간과 마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