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75. 레벨테스트 말아먹어도 괜찮아.
"혹시 지금 가고 있는데 식사 가능할까요?"
"몇 명인 데요?"
"두 명이요. 거의 다 왔어요."
"네, 걱정 말고 오세요."
패딩을 여민 손도 풀고 휙휙 바람을 가르며 아이 손을 꼭 잡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식당에 도착하니 브레이크 타임 15분 전이다. 드르륵. 넓은 식당에 딱 한 분이 식사하고 계셨다. 살짝 눈치를 보며 빠른 속도로 자리에 앉으며 주문했다.
"저희 장터국밥 하나, 사골국밥 하나 주세요."
"언니가 전화했구나.?"
"네, 너무 먹고 싶었어요. 정말 감사해요."
아이와 함께 근처 학원에서 레벨테스트를 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바로 옆 골목에 맛있는 국밥집을 남편에게 추천받았는데 브레이크 타임이 있었다. 시간이 빠듯해 아이가 레벨테스트 보는 동안 시계를 자꾸만 봤다. 다행히 테스트는 금방 끝났고 상담도 길어지지 않았다. 학원을 나서자마자 식당에 전화했는데, 흔쾌히 양해해 주셨다. 들어오면서 간판을 올려다보니 예전에 한 번 와본 기억이 났다. 주문한 지 5분도 안 되어 음식이 나왔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벌건 국물에서 따뜻한 김이 올라온다. 한 입 급하게 국물을 떠먹는다. 뜨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몸을 데운다. 차가운 날씨에 언 몸도, 안 좋은 테스트 결과에 언 마음도 풀린다. 칼칼하고 진한 국물에 밥을 말아서 한 입 먹고, 국수를 말아 한 입 먹는다. 이 근방에서는 유명해서 국밥계의 샤넬쯤 된다던 남편의 말에 수긍하면서 깍두기와 또 한입 가득 먹는다. 큰 기대 없이 본 레벨테스트였지만 결과는 예상한 것보다도 별로였다. 학원에 다니고 있지 않아서 아이의 현재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본 것이라기에도 아쉬웠다. 깍두기를 깨물자 시큼하고 달큰한 국물이 배어 나온다. 그 김에 생각을 급하게 틀어본다. 아니다, 잘됐다. 버스 타고 오는 길에 아이가 멀미해서 다닐 수 있을까 싶었는데 고민하지 않고 오히려 좋네! 들이키는 얼큰한 국물에 마음까지 화끈해진다.
사실 실패에 둔감한 편이다. 엊그제 아침만 해도 실패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분명 알람에 눈을 떴고 잠시 아이를 안고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아이가 평소 등교하는 시간이 지나있었다. 서둘러 아이를 깨우니 아침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며 잔뜩 골을 내다 등교했다. 눈물까지 보인 아이가 안쓰러워 미안하긴 했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는데 실패한 나의 마음은 금세 괜찮아졌다. 기상 미션이야 가볍긴 하지만 다방면의 잦은 실패에도 타격은 깊게 받지 않는다. 한때는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 스스로 패배자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입시, 취업 같은 묵직한 실패만 쳐도 실패의 역사는 꽤 길다. 어느 순간 실패가 당연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실패의 경험은 차곡차곡 착실하게 쌓여갔지만, 다행히 그 속에는 깨달음의 순간도 끼어 있었다. 돌이킬 수 없는 분명한 실패인 줄 알았는데 더 나은 길이 열리는 것을 겪었다. 오랫동안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괜찮은 선택지가 눈앞에 나타나기도 했다. 실패 너머에 나에게 좋은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들기 시작하자 실패의 순간이 가볍게 느껴졌다. 실패에 속상한 마음이 들다가도 금세 돌아설 수 있게 되었다. 실패를 밥 먹듯이 해도 삼시세끼 밥을 먹듯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실패 생활자가 되었다.
실패해도 다음을 기약한다. 도전했으니 실패한 것이라고 정당화하기도 한다. 실패가 두렵지 않아 자꾸 시도하니 실패는 쉴 새 없이 쌓여간다. 아이는 나와 다른 성향이다. 불안이 높은 기질이라 조심성이 많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주저한다. 처음에는 자꾸만 시도하게 했다. 몇 번 실패하더라도 곧 나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는 생각에 다그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했다. 나에게는 늘 즐거운 도전이 아이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무조건 해보라고 하지 않게 되었다. 아이의 시선에서 이해하고 행동하려 하지만 아직 하던 대로 할 때도 많다. 레벨테스트도 그냥 한 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예약했다. 그 안에는 낮은 반이라도 수강해 봤으면 하는 욕심과 실패해도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무심함이 섞여 있었다. 아이는 아마 어느 쪽도 아니었을 것이다. 엄마 따라 보게 된 테스트지만 내심 기대했을까 봐, 그래서 결과 보고 괜히 마음이 움츠러들었을까 봐 뒤늦게 눈치를 살폈다. 내 성향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나처럼 받아들이면 좋겠다. 별것 아니다, 다시 해보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혹시라도 좌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버스 타고 멀미해서 지하철 타고 다녀야 하나 싶었는데 괜한 걱정 했다고 너스레를 떨며 깍두기를 아이 숟가락 위에 슬쩍 올려준다. 따뜻한 국물이 녹여주는 것은 내 마음보다는 아이 마음이 먼저이기를 바란다.
"신은 지름길로 가게 하려고 우리로 하여금 길을 잃게 만들기도 한다."
지구별 여행자, 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