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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Dec 17. 2024

프롤로그. 탐구생활을 아시나요?

D-77. 80일간의 방학일주

내가 아이만 했을 때, 방학식에는 '탐구생활'이라는 한 권의 책을 받았다. 우리는 방학 동안 매일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들으며 탐구생활을 토대로 하루치 숙제를 했다. 방학이 끝난 후에 원래의 책은 2배, 3배로 불어나 있었다. 누가 누가 더 두꺼운 책을 만드는지가 중요했다. 하루치 숙제를 한 두 줄 적는 것에서 끝나지 않았고 몇 장의 종이를 양쪽 면에 붙여가며 내용을 채웠다. 종이탈을 만들기도 하고, 물로켓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게 두꺼워진 탐구생활은 선생님의 매서운 눈을 거쳐 교실 뒤편 혹은 복도에 전시되곤 했다. 친구들, 선생님의 기준에서 멋져 보이려고 애썼다. 남들보다 더 두껍고, 더 화려한 과제를 제출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떤 색의 딱지가 겉면에 붙을지 두근거렸다.(표지에 금, 은, 동 구분하여 딱지를 붙여주셨던 것 같다) 반면에 예상과 다른 딱지가 붙어도 개의치 않았던 기억도 있다. 방학 동안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개학을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마음으로 책가방에서 두툼해진 탐구생활을 꺼내던 기억이 떠오른다. 탐구생활의 두께만큼 마음이 꽉 차 있던 그때는 어떤 결과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번 방학은 스스로 만족스럽던 그때를 기억하며 나를 기준으로 보내보려 한다. 아이는 아이 만의 방식, 나는 나만의 방식을 찾아 방학을 지내보려 한다. 80일 뒤 개학식을 서로 얼마나 성공적인 시간을 보냈는지 공개하는 날로 여기면 될 듯하다. 업그레이드된 내가 데뷔하는 날이다. 방학을 기록하며 탐구생활을 채워가듯 성장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을 이번 방학의 숙제로 정했다. 기록하는 것은 오늘은 돌아보게 하고 어제를 생각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과 머릿속에서 얼마나 많은 화학작용이 일어나는지 안다. 그동안 브런치에 글 쓰며 체득한 기록의 효과를 이번에도 보고 싶다. 게다가 평소보다 더 긴 방학은 시행착오 속에서 나만의 방식을 찾아내기에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어떻게 삶의 방식의 질을 레벨업 해나갈 것인가. 그 방법은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각자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살아가고 성장해 가는 과정 속에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나만의 방식을 어떻게든 찾아나갔습니다. 트롤럽 씨는 트롤럽 씨의 방식을 찾아냈고 카프카 씨는 카프카 씨의 방식을 찾아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을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하루키.


석면 공사 때문에 평소보다 이른 방학이 시작되었다. 기나긴 방학은 진작에 예고된 일이었다. 한달살이를 가볼까, 방학 특강을 등록해 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결국 별다른 준비 없이 방학을 맞고 말았다. 모두에게 적절한 방안을 찾다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따라잡지 못했다. 계획 없이 방학을 맞이한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방학한 첫날 아이와 다투고 말았다. 숙제하는 아이의 삐딱한 태도에 기분이 상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처음엔 차분한 어조로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처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큰 소리를 내자마자 아차 싶었지만, 강둑이 터지며 강물이 쏟아지듯, 아이에게 마음의 소리를 쏟아붓고 말았다. 곧바로 왜 그랬을까 후회하며 되짚었다. 미처 하루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화를 내다니 자책할 수밖에 없다. 남은 방학을 어떻게 보내나 고민이 깊어졌다. 긴 방학을 지혜롭고 현명하게 보내고 싶었을 뿐인데. 아이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성장의 시간이 되기를 희망했는데 시작부터 어그러진 걸까? 아니다, 방향을 바꾸며 달리 생각해 보자. 점점 나아지는 나에게 초점을 맞추니 나쁘지 않은 출발이다. 어제보다 나은 모습이 바로 성장이라면 방학 첫날부터 원하는 바를 이룬 셈이다. 오늘은 다투지 않았으니, 어제보다 성장했다. 그것은 비록 티끌만큼의 성장이겠지만 80일 후에는 차곡차곡 쌓여서 태산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80일간의 방학일주' 최근에 아이와 함께 읽은 책에서 이번 방학의 제목을 뽑아보았다.『80일간의 세계 일주』 속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의 목표는 80일간 세계 일주를 마치는 것이었다. 어떤 사건사고도 없이 평온한 세계 일주를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려도 포그는 동요하지 않는다. 모두 예상한 일이고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평소 100%에 가까운 P 성향으로 생활하는지라 계획과는 다소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번 방학에는 돌발상황까지 철저하게 계획하는 필리어스 포그에게 빙의하여 계획형 인간의 탈을 써봐야겠다. 그 탈을 쓰고 80일을 잘 채워봐야겠다. 두꺼워진 탐구생활을 가지고 설레는 마음으로 개학날을 기다렸던 그때처럼 80일 뒤, 이번 개학날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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