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즐겨본 드라마는 ‘반짝이는 워터멜론’이다. 주인공인 아들역 은결(려운)이 과거로 돌아가 아빠인 이찬(최현욱)을 만나는 타임슬립 드라마이다. 아들(려운)과 딸(설인아)이 각자 엄마아빠의 학창 시절로 돌아가서 겪는 일들이다. 아들은 아빠의 안타까운 사고를 막으려 필사적이고 딸은 엄마와 이어지지 않은 첫사랑을 이어주려 한다. 스트레스 주는 악역도 없고 고구마 먹은 것처럼 답답한 배역도 없다. 내 부모의 학창 시절을 보고 있는 듯 아련하고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주인공이 밴드맨인데 그 밴드가 연주하고 부르는 노래(카메오로 출연하는 윤도현이 불렀다.)를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울고 웃으며 재미있게 보았는데 끝난 지 꽤 된 지금도 떠오르면 기분이 좋고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드라마였다.
돌아보니 최근에 재밌게 봤던 것들이 타임슬립드라마가 많았다. '재벌집 막내아들'도 일종의 타임슬립이었고 스릴러요소에 재미가 더해진 '어쩌다 마주친, 그대'도 그렇다. 대만드라마 '상견니'를 리메이크했다는 '너의 시간 속으로'도 타임슬립이었지. 그런 드라마들의 시대인 건지, 과거에 미련이 많아진 내가 타임슬립 드라마에 푹 빠진 것인지 모르겠다.
내가 선택해서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면, 어느 시절로 가볼까 생각해 본다. 엄마아빠의 과거로 돌아가 엄마아빠와 친구가 되어볼까? 아니면 과거로 돌아가 가장 후회하는 선택을 되돌려 볼까? 혹은 미래로 가서 궁금한 것들을 미리 확인하고 돌아와 지금 생을 어마어마하게 바꿔볼까? 지금 내 인생에 무언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의 삶이 충분히 만족스럽다기보다 지금의 인생은 수많은 선택들이 쌓여 이루어진 것일 텐데 그중 어떤 것 하나가 달라졌을 때 나비효과처럼 어떤 변화를 일으킬지 두렵기 때문이다. 전지전능한 신처럼 미래를 알고 선택하는 것 같아도 그 선택이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분당땅을 잔뜩 사두어서 시세차익을 보았는데 그걸로 투자한 것으로 쪽박을 차서 채권자들한테 쫓기는 삶으로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겁이 많은 나는 인생을 지금 이대로 놔두고 싶을 것 같다.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현재를 충실하게 살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뭔가를 바꿔보려는 파격적인 선택은 또 못하겠고. 또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병. 물속에 비친 뼈다귀를 보고 왕! 짖으면 지금 갖고 있는 뼈다귀도 잃게 된다는 교훈이라도 얻을 텐데 말이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편이었다. 해보고 아니면 말지, 다시 하면 되지. 약간 막무가내 같은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는 점점 도전하는 횟수가 줄어든다. 새로운 것은 일단 경계하고 본다.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것인지 예전보다 하나라도 더 갖고 있다고 여기는 것인지. 젊은 시절의 치기라는 말이 왜 있는지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80살에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고, 85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 할머니처럼 늙고 싶었는데.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비로소 실감한다. 어제보다 늙은 만큼. 오늘 딱 그만큼 더 어렵게 다가온다.
어디선가 본 글이었는데, 80살의 내가 지금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지금의 내가 얼마나 젊고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하며 지금 나를 화나게 하는 아이는 얼마나 그리웠겠냐는 것이다. (도저히 어디서 봤던 것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그걸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난다. 푸석하게 느껴졌던 피부에서 윤이 나는 것 같고 아이의 오동통한 손을 잡고 놓기가 싫어졌다. 그게 바로 내 인생의 타임슬립 아닐까.
'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라는 말을 보고는 누구든 충격을 받지만 매 순간 그 말을 떠올리며 현재에 집중해 살기는 참 어렵다. 오늘의 내가 가장 젊다는 것을 알지만 얼마 안 남은 올해 달력의 날짜를 세며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시간은 왜 이리 빠른지 한탄하게 된다. 자, 오늘부터 한 번 인생 2회 차처럼 살아봐야겠다. 로또 당첨번호는 알 수 없겠지만 지금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80살 할머니이었던 내가 보면 현재의 내가 얼마나 사랑스러울까. 뭐 하나 제대로 집하는 것이 없어서 안타깝기보다는 설거지만 해도 대견해할 것이다. 아이가 수학심화문제를 풀지 못해 화가 나기보다는 즐겁게 웃으며 등교하는 것에 감사할 것이다. 50년을 거슬러 왔다고 생각하면 일희일비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저 모든 것을 허허 웃으며 넘길 수 있게 되겠지. 내 인생의 타임슬립을 잊지 말자. 안녕하세요, 2074년에서 온 여유입니다. 반갑습니다!
*'오후의 글쓰기'(저자 이은경)에 나오는 글쓰기 과제를 연재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