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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사실주의에서 추상화까지.

매일글쓰기 13.

by 다정한 여유



오늘의 글감 : 일기 써보기

오늘 한 일만 나열해도 일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중에 하나, 잠깐의 순간만 콕 집어 써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냥 부담 없이 오늘을 기록한다는 정도로요.




일기 하면 초등학생 때, 아니 국민학교 때가 생각난다. 매일 쓴 일기를 아침마다 선생님 책상에 올려두었던 기억. 오늘은 선생님이 한 마디를 써주셨을까, 도장만 찍혀 있을까 기대하며 받았다. 대부분은 하기 싫은 숙제였지만 가끔은 선생님께 받는 칭찬 쪽지였다. 글쓰기 연습이었나 싶지만 글감 찾기 훈련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저학년 때는 거의 시간표를 읊듯 했던 일기. 오늘은 집에 와서 간식을 먹고 동생과 놀았다. 재밌었다. 사실 나열과 끝에 겨우 덧붙인 한 줄의 감상 정도가 다였다. 그림으로 따지면 사진을 찍은 듯한 사실주의다. 고학년이 되면서 감상이 조금씩 늘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가끔씩 썼던 중고생 때의 일기는 초등학교 때와는 반대다. 사실 한 줄에 나머지는 쭉 감상이다. 예를 들면 친구와 싸웠다. 내가 얼마나 속상하고 슬픈지에 관해 구구절절 써 내려갔다. 사물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인상주의랄까. 그러다가 대학교 때 썼던 일기는 추상화에 가깝다. 미니홈피에 종종 일기를 썼는데 모두에게 공개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의 마음은 쓰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 무슨 사건인지도 모르겠고 정확한 설명도 없다. 은유와 비유만 가득해서 지금 읽으면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수준이다.





다시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금세 바람처럼 잡을 수 없이 흘러가 버리는 매일, 찰나에 떠올랐다 자취를 감추는 생각들. 이걸 적어두고 잡아두고 싶어졌다. 집에 수첩도 많고 선물 받은 일기장도 있지만 어쩐지 쉽게 시작이 되지 않는다. 평범하기보다는 특별하고, 뭔가 깊은 깨달음이 있는 날을 적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그러니 다시 쓰려면 일단 부담을 덜어야 한다. 초등시절로 돌아가 그 시절 수준의 일기를 써보자. 쉽고 단순하게 오늘 하루 중 어느 시점에 한 일을 적어보자.




AM 07:08 흔들리는 지하철 속이다. 다행히 출발지에서 탄 덕에 앉아있다. 출근길이지만 사람들은 이미 피곤한지 눈을 다들 감고 있다. 아니다, 오늘 하루를 위해 마음속으로 명상을 하고 하루를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생각을 바꾼 것뿐인데 갑자기 사람들 얼굴이 환해진 것 같기도 하다. 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참 예쁘다. 강도 보인다. 바다일 수도 있을까, 아닐 것 같다. 평소라면 이 시간에 집에 있었을 텐데, 바깥은 이렇게 분주했구나. 앉아서 출근하니 이렇게 글도 쓸 수 있다. 앉아서 가서 참 좋다. 두서없이 일기 끝.




나중에 봤을 때, 어떤 일기가 더 좋은 일기일까. 이순신 장군님의 난중일기도 거의 감상 없는 업무일지 같지만 후세 사람들에겐 이순신 장군의 성정과 그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반면 안네의 일기에는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두렵고 절망하면서도 잃지 않는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위로를 주는가. 결국 어느 편도 다 좋은 것 아닐까. 어떤 일기가 더 좋을까 고민하지 말고, 더 깊은 마음과 생각을 담고 싶어 주저하지 말고, 그냥 한 줄이라도 적으면 그게 바로 좋은 일기라 믿는다.



내 일기를 보고나니 아이한테 글쓰기 못 한다고 뭐라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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