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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Jan 08. 2024

일상으로 시차적응 중입니다.

일본여행을 다녀왔다. 3박 4일이었지만 갈 때는 저녁 비행기, 올 때는 낮비행기라 온전히 여행한 날은 고작 이틀이었다. 다녀와서 녹초가 되어 늦잠에 낮잠까지 섭렵하며 늘어져 있으니 남편이 많이 힘들었냐고 묻는다.

"나 지금 시차적응 중이야."

하늘도 파랗고 골목도 이쁘고. 여행 가면 무엇이든 예뻐 보이는 모양이다.


아이가 방학식을 마치고 오자마자 바로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갔다. 아이의 학원은 당연히 올스탑, 매일 하던 집공부도 올스탑이다. 매일 루틴을 지키려면 여행에 가든 할머니집에 가든 늘 지키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그러려면 꽤 많은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것이 틀림없다. 여행짐으로 이미 가득 찬 캐리어를 보며 어디에 문제집을 넣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려본다. 나의 루틴을 지키려면 노트북이 필요한데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 고민을 해본다. 문제집을 찢어서 몇 장만 가져갈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엄마의 약한 의지에 꺾여 아이의 문제집은 고이 두고 떠나기로 한다. 오히려 나의 루틴에는 좀 더 의지가 불타는지 몇 가지 준비물들을 챙겨본다. 물론 캐리어 공간을 생각해서 최소한으로.


저녁 늦게 도착해서 멀리 밥을 먹으러 가지는 못했다. 게다가 2살 아가와 함께한 여행이라 거리에서 솔솔 풍겨오는 꼬치냄새, 고기냄새를 뒤로 하고 숙소 앞 편의점을 털며 끼니를 때울 만한 주전부리를 구입했다. 맥주를 하나 까니 여행 온 설렘처럼 거품이 몽글몽글 계속해서 올라온다. 특별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이 맛이라며, 맛있게 먹고 각자 방으로 돌아와 시계를 보니 집에서라면 아이는 이미 잘 시간이 지났다. 만약 지금 아이에게 하루 루틴을 하라고 했으면 입이 얼마나 나왔을까 생각하며 내 선택이 현명했다고 혼자 위로해 본다. 같이 간 동생은 일주일 뒤 복직을 앞두고 여행을 왔다. 어디든 가고 싶었지만 얼마 전에 제주도는 다녀왔고 어린아이와 비행이라 멀리 가긴 어려웠다. 당분간 꼼짝 못 하고 회사에 적응할 것을 생각하니 어디든 가고 싶다고 해서 머리 맞대고 고르고 고른 곳이 가까운 일본이었다. 이틀 동안 아쉬운 마음을 모두 털기로 하고 아침 일찍부터 열심히 돌아다녀본다. 줄 서는 맛집도 가보고 백엔샵에서 마음껏 질러도 본다.

추적추적 비가 와서 우산을 들고 다니는 것이 번거로운데도 그저 운치 있게 느껴진다. 일본어와 영어와 한국어가 뒤섞인 거리와 상점에서는 평소에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의사소통이 얼마나 감사한지 느껴본다. 밥하고 치우고 청소하던 집안일에서 벗어나 남이 해준 밥을 먹고 숙소에 돌아오면 우렁각시가 왔다 간 것처럼 말끔하게 정돈된 공간이 날 반겨준다. 아이는 아이대로 학원 가고 숙제하던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음식을 맛보고 못 보던 물건을 구경하며 뭘 살까 심각하게 고민을 한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일상과 조금 다른 하루를 선사해 준다. 기존 일상은 잠시 멈춰있으니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문득문득 여행 후가 걱정되기도 한다. 방학특강 교재는 다 준비를 했던가, 집에 돌아가면 뭔가 해 먹을 수 있는 재료가 냉장고에 있던가. 내가 잠시 미뤄뒀던 일상들은 어디까지 챙겨야 할까.




한 시간 비행에 고작 며칠의 여행인데도 다녀오고 나니 빨랫감은 한가득이고 사 온 것들을 정리하니 조용하고 공허했던 집이 금세 난장판이 되며 온기가 차오른다. 그 와중에 배가 고픈데 빨갛고 매운 음식이 먹고 싶어 떡볶이를 배달시키고 빨래를 돌린다. 비행기모드에서 변경하자마자 띠링띠링 울려대며 오던 각종 알람들처럼 집에 오자마자 잠시 멈춰뒀던 일상이 일시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서있는 자전거를 움직이려면 돌아가던 페달을 밟는 힘보다 좀 더 많은 힘이 필요한 것처럼 멈췄던 일상을 다시 돌아가게 하는 데에는 평소보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자, 쉼을 통해 힘을 내보자. 여행모드에서 일상모드로 시차적응이 필요하다.

돌아오는 날엔 아쉬운 마음에 멈춰있는 비행기까지 예뻐 보인다.


복권에 당첨된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1년 동안 세계일주를 하겠다는 말을 제일 먼저 떠올렸었다. 여행을 좋아하기도 하고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것을 최고의 재미로 느꼈다. 여행지에서의 고생도 마냥 삶의 이벤트처럼 느껴져 이게 다 추억이지,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되겠네, 하고 웃어넘겼다. 내 일상이 여행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다음 여행을 떠나기 위해 일상을 버틸 뿐이었다. 여행은 늘 그렇게 설레기만 했었는데 어느 순간 여행을 가기 전부터 벌써 다녀와서가 걱정되어 설렘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여행이 길수록 돌아와서 정리해야 할 일이 많은 것 같고 일상에 회복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같아 마음이 부담이 조금씩 늘었다. 이제는 1년 동안 여행을 하라고 제안을 받아도 망설이게 될 것 같다. 반년도 안되어 일상이 걱정되고 그리워질 거라는 것을 안다. 일상이 예전보다 안정되고 일상 속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찾기 시작한 것 아닐까. 일상과 여행이 균형을 이룬 지금이 더 좋다. 여행은 일상이 있기 때문에 떠날 때 설레고, 돌아올 일상이 있어 더욱 소중한 것 같다.



소금의 양은 같지만 얼마만 한 넓이의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짠맛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류시화



일상에는 힘든 일, 괴로운 일들이 짠맛처럼 사이사이 끼어있다. 여행을 다녀오면 마음이 넓어지는지, 추억할 거리가 생겨서인지 일상의 짠맛이 조금 희석되는 것 같다. 한 때 소망했던 것처럼 1년 내내 여행만 하는 것을 상상해 보면 소금이 맛이 느껴지지 않는 밍밍한 상태가 될 것 같다. 이번 여행 말미에는 '힘들다. 당분간 여행은 안 가도 되겠어.' 하며 다짐을 했다. 아이가 마냥 즐거워하지 않아서 '나 혼자 좋자고 여행 온 것도 아닌데! 그만 올 거야!' 하며 남편에게 푸념을 늘어놓았다. 그래놓고 빨래를 다 개기도 전에 아이에게 묻는다. "그럼 다음 방학에는 어디가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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