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국내에 하나인줄 알았는데 이 명소가 두 개라니?

by 박창흠

1. 낙화암


충남 부여의 부소산 낙화암 바위 절벽에 백제의 삼천궁녀가 뛰어내렸다는 전설이 있지만 사진으로 보듯 그렇게 넓은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낙화암하면 당연히 부여만 떠올리지만 그 만큼 슬픈 이야기를 간직한 영월에도 낙화암이 존재한다.
이곳이 낙화암이라 불리게 된 것은, 1457년 10월 단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들은 궁녀 등이 이 절벽에서 뛰어내렸기에 그 뜻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00000.jpg 좌) 영월 낙화암 / 우) 부여 낙화암

영월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될 때 궁녀와 관리인, 종인 등 6명이 몰래 따라왔다고 한다. 궁궐에서 일하기에 임금의 명 없이 임의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어서 엄연히 국법을 위반하는 죄를 범한 것이지만 이들은 청령포에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단종을 모셨다.
단종이 사약을 받을 당시 관풍헌에서 쫓겨나 있던 그들은 승하 소식을 듣고는 동강 절벽에 올라가 뛰어내렸다고 한다. 당시 천민이던 무녀에 이르기까지 따라 죽은 이가 90명이나 되었으며, 그날 비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는 등 하늘마저 슬피 울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단종의 승하 소식에 몸을 던진 비극이 일어난 후 315년 뒤, 또 한 번의 비극이 낙화암에서 벌어지니, 기생, 경춘의 사연이다.
영조 시절 1756년에 태어난 경춘은 원래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고경명의 후손인 양반가의 딸, 고노옥이다. 하지만 8세 때 부모가 한꺼번에 돌아가고 의지할 곳이 없어 결국 관아에 소속된 기생이 되는데, 10세 이전에 이미 동서고금의 경서를 읽을 줄 알았고 1년 만에 춤과 노래를 통달해 당시 영월 일대에서 화제가 되었다. 그녀 나이 16세인 1772년, 영월부사로 부임한 이시랑이 매우 아껴 그녀의 머리를 올려주었는데, 이후 그가 한양으로 복귀한 뒤 후임 부사 신광수가 그녀에게 수청을 요구하지만, 이에 불응하다가 수차례 볼기를 맞아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다.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고 여긴 10월 어느 날, 예쁘게 옷을 차려 입고 관아에 가서 수일만 달라고 시간을 번 뒤, 다음날 아버지 묘소를 찾아가 하직 인사를 하고 기방 동생들의 머리를 빗어주며 작별을 고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강 낙화암 절벽 위에 올라가 노래 몇 수를 부른 후, 따라온 동생은 돌려보낸 뒤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을 선택한다.



2. 석굴암


경북 경주 토함산 중턱에 있는 석굴암은 국보 제24호로 남북국시대 통일 신라의 김대성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런 석굴암이 서울 보문사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고보니 보문사도 대부분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로 인식하지 서울 보문사는 잘 모른다.
강화 보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이고 성북구 보문동에 위치한 보문사는 대한불교보문종의 총본산이다.

00001.jpg 좌) 서울 보문사 석굴암 / 우) 경주 불국사 석굴암

서울 보문사는 1115년 당진국사가 비구니 스님들의 수련장으로 창건해 지금까지 여승을 위한 사찰로 이어져 왔으며, 국가의 안녕과 왕실의 번성을 기원해 왕실의 보호를 받아 1747년에 첫 중건하고 순조 시기 만세루를 새로 짓고 고종 시절에 좌우 승당을 추가로 수리했다.
이때 왕실의 시주도 받고 후궁과 상궁 등 궁인들과 사대부까지 불사에 동참했다고 할 정도로 궁중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사찰 가장 안쪽에 경주 석굴암을 재현한 보문사 석굴암은, 1970년 8월에 착공해 1972년 6월에 준공했는데, 일부 세부 구조는 다르지만 3.8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불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



3. 부석사


영주 부석사와 서산 부석사, 어디가 더 친숙한 사찰인가?

영주 부석사는 고려시대 건축양식이 남아 있어 다른 절과 차별화되며, 원효대사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의상대사가 676년에 창건했다.
절 이름이 ‘떠 있는 돌 사찰’이라는 의미의 부석사(浮石寺)인 이유는, 의상대사를 사모한 선묘낭자가 돌이 되어 날아다니며 도적떼를 물리쳤다는 신비한 설화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 건물은 고려 중기에 세워져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사각형 편액에 써진 무량수전의 한자 글씨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 때 안동까지 피난왔다가 되돌아가는 길에 부석사를 방문해 쓴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많이 알려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은 땅에서부터 3분의 1지점이 가장 볼록한 형태인 배흘림기둥으로 만들어져 있고, 기둥 간 간격도 일정하게 조정해 멀리서 볼 때 안쪽으로 굽어 보이는 착시현상을 해소하여 시각적 균형을 이루고 있다.

00002.jpg 좌) 서산 부석사 / 우) 영주 부석사

서산 부석사는 영주 부석사가 건립된 지 1년 뒤인 677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위에서 소개한 대로 영주 부석사와 동일한 창건 신화를 갖고 있는데, 의상대사와 선묘낭자와 관련되는 건물이나 유물이 없기에 해당 사찰에서도 그 창건 설화는 영주 부석사가 맞는 것 같다고 예전에는 인정했었다.

서산 부석사는 도비산 산자락에 위치하여 다른 사찰에서 보기 힘든 특이한 건축물과 편안한 분위기가 장점이며 영주 부석사에 없는 템플스테이도 진행하고 있다.
이 절은 조선 건국을 도운 무학 대사가 더 크게 중건했고, 근래에도 만공스님이 큰 영향력을 떨쳤다고 하니 역사가 깃든 큰 사찰이 분명하며,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본당은 안양루를 거쳐 이르게 되어 있어 가람 배치는 영주 부석사와 유사하다.

정작 서산 부석사가 세상에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2012년 우리나라 절도단이 대마도 간논지(관음사)에서 금동관음보살좌상을 훔쳐 가져왔다 검거되었는데 이 불상이 원래 1330년 서산 부석사에서 만들어 봉안했다는 기록이 존재해서 큰 뉴스가 되었다.


이 글은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별난 국내여행 편-에 수록된 지역과 설명을 토대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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