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가 한국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일본의 과거

by 박창흠

임진왜란 무렵까지 울릉도와 독도의 존재를 모르던 일본 본토 어부들이 우연히 동해 바다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발견하고, 1618년에 도항 허가를 받아 수시로 울릉도를 드나들며 그 중간에 위치한 바위섬(독도)에서도 물고기를 잡고 강치를 사냥하고 나무를 베어 가던 사실을 조선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던 중 소중한 두 섬이 우리 영토임을 입증한 위인이 등장하니 그의 이름은 안용복(安龍福, 1658~?)이었습니다.
원래 동래군 노비이던 안용복은 수군에 복무하며 부산포 왜관 일본인과 자주 접하며 일본어 통역 일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본어 통역만으로 먹고살 수 없었는지 어부로도 일했는데, 당시 어부들은 금단의 섬, 울릉도 인근에서 물고기가 많이 잡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1693년에 동래에서 출발한 안용복 등 40여 명의 어민들이 울릉도에 갔다가 일본 어부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안용복 일행은 “ 왜 조선 땅에 침범했느냐.” 고 항의했지만, 월등히 숫자가 많았던 일본 어민들은 이 섬이 조선 땅인 줄은 모른 채 자기네가 발견한 무인도라며 오히려 안용복 일행을 붙잡아 일본으로 끌고 갑니다. 하지만 일본 관리는 심문 도중 1625년에 오야(大谷) 가문과 무라카와(村川) 가문이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까지 항해해도 된다는 도해 면허를 발급받은 사실을 확인하면서 난처해집니다. 도해 면허란, 외국에 나갈 때 발행하던 허가증이니 일본 막부는 이미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였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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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어부 : “조선인이 우리가 발견한 섬을 조선 땅이라 우겨서 열받아 데려왔다.”

안용복 : “울릉도와 독도는 쭈욱 우리 땅인기라. 너거 땅이란 증거 대보소.”

일본 관리 : “너네 오야 가문이 거기서 고기 잡는 근거 문서 제시하라.”

일본 어부 : “여기 막부로부터 받은 도해 면허가 있다.”

안용복 : “ 도해 면허라는 건 외국 나갈 때 받는 허가증이니 일본 땅이 아니라니까?”

일본 관리 : “ 헉! 조선인 말이 맞네. 너네 오야 놈들 왜 외국인을 납치하냐?


결국 일본은 다시는 울릉도로 가지 않겠다는 서류를 써주며 안용복 일행을 조선으로 돌려보내줍니다.
당시 일본에 양심적인 공무원이 있었군요. 하지만 돌아오던 길에 대마도주가 안용복과 동료들을 억류해 고문하고 서류를 빼앗아버리는데, 얼마 안 가 대마도주 소 요시츠구(宗義倫)가 죽고 양자가 새로이 대마도주가 되니, 그는 조선인들을 불법 억류하고 고문한 것이 들킬까 봐 2년간 이들이 회복되도록 치료해주면서도 조선에는 표류한 조선 어부를 구출했다고 거짓말하고, 오히려 “ 일본 땅인 죽도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 달라.” 는 뻔뻔한 서계(書契, 국서)까지 동봉해서 조선 관리에게 보냅니다.

수년 뒤 일본 막부가 난리난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대마도 사람들은 일본 이름을 팔아 중간에서 스윽 울릉도를 차지하려고 했나 봅니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대마도주가 건넨 서계에서 언급하는 죽도가 울릉도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공연히 외교 문제가 되길 원치 않아 울릉도가 조선 영토이지만 우리도 어민들 안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그냥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에 도저히 안되겠다 싶었던 안용복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진해서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1696년에 조선 관리 복장을 갖춰 입고 뜻을 함께한 동지 11명을 모은 안용복은, 순천 송광사 뇌헌스님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자신은 ‘울릉우산양도감세장’ 이라는 관리이며, 울릉도, 독도 모두 강원도에 속한다.” 고 주장하자 일본 막부는 조사에 나서 자신들이 잘못했다고 시인했고, 울릉도 침입 및 월경을 금지하겠다는 공식 서한을 보내옵니다.
이렇게 일본이 고개를 숙이자 그제야 강경론이 거세지며 일본 어부의 출입을 금지하라고 지시합니다. 외교 참 잘하셨네요. 그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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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계기로 숙종은 그동안 섬을 비워 온 정책을 재검토 하기로 하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전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파견나간 관리가 살기 불편하다고 고하자 이주를 포기하는 대신 정기적으로 토지를 조사하는 수토(搜討) 제도를 실시하기로 하고, 1697년부터 3년마다 한 번씩 울릉도와 부속 도서를 조사하고 감독하게 됩니다.
다만 신분을 속이고 일본과 협상한 안용복에 대해 다수의 신하들이 사형을 요구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남구만(南九萬), 신여철(申汝哲) 등이 적극적으로 변호해 변방에 유배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는데, 안용복은 그 논의기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마포나루에서 배를 탔다는데, 어디로 유배갔는지, 어떻게 사망했는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지요.
현재 그가 태어난 부산광역시 수영구 수영사적공원 내에 위치한 수강사(守疆祠) 사당에 안용복을 모시는 위패와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울릉도에는 안용복 충혼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글은 <알아두면 쓸데 있는 유쾌한 상식사전> -별난 국내여행 편-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정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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